[김철웅의 촌철살인]

[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낯선 사람을 부를 때 난감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특파원을 지낸 러시아도 그렇다. 호칭에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는데, 거기엔 정치·사회적 격변이 반영돼 있다.

소련 시절에는 그 방식이 아주 간단했다. 적어도 이론상 모든 인민이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타바리시(동무)’란 호칭이 통용됐다. 최고권력자인 공산당 서기장을 부를 때도 타바리시 브레즈네프, 타바리시 안드로포프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이름을 모르는 낯선 사람은 그냥 ‘타바리시’라고 불렀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호칭에 혼란이 일어났다. ‘타바리시’를 대체할만한 적당한 호칭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타바리시는 군대 내에서나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호칭이 ‘가스파진(시민)’이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쓰이던 것으로 여성은 ‘가스파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호칭도 널리 통용되지는 않고 있다. 워낙 오랫동안 사장돼 있던 말이기 때문이다. 특히 낯선 사람을 부를 길이 막연해졌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서는 ‘멀라도이 첼라베크(젊은이)’와 ‘제부시카(소녀)’란 호칭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젊은이’는 남자를, ‘소녀’는 여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이에 따라 식당에서 40∼50대 중년 여종업원을 ‘소녀’라고 불러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그게 쑥스러운 사람은 ‘저기, 여보세요’ 정도로 번역되는 ‘부체, 다브르이’를 쓰기도 한다.

©픽사베이

그러나 낯선 이에 대한 호칭이 어려운 것은 따지고 보면 한국도 마찬가지다. 외국인들이 특히 애를 먹는 것은 대화 상대에 따라 호칭을 달리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된 중국인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함께 온 50대 교수에게 “너 먹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나중에 그는 ‘너’의 존칭이 ‘당신’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얼마 뒤 다시 식사를 하면서 그는 교수에게 “당신이 먹어요”라고 말했다. 이번엔 좌중이 웃음바다가 됐다.

약국에선 ‘약사님’이라고 부르면서 병원에선 왜 ‘의사님’이라 하지 않고 ‘의사 선생님’이라고 하는지도 궁금하다. 시대에 따라 호칭이 변하기도 한다. 과거 ‘아저씨’ ‘아주머니’는 동네 어른 등을 친숙하게 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느 틈에 생면부지의 남을 존중하는 뜻 없이 부르는 말이 됐다가, 비속어 취급을 받게 됐다. 특히 ‘아줌마’가 그렇다.

이처럼 어지러운 호칭 문화 속에 흥미로운 소식이 들린다. LG유플러스가 올해부터 사내 임직원끼리 부를 때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홍길동 팀장님’ ‘김철수 상무님’으로 불렀지만 앞으로는 ‘홍길동님’ ‘김철수님’으로만 부르면 된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기업들의 이런 ‘호칭 파괴’는 LG유플러스가 처음은 아니다. CJ그룹은 2002년부터 회장 이하 일선 직원까지 호칭을 ‘님’으로 바꿨다. 사내에서는 이름 뒤에 ‘님’이란 호칭이 자연스럽다.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임원 아래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 등 전 직급의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SKT도 최근 직원들의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렇게 IT업계를 중심으로 직급·호칭을 파괴하는 것이 확산되는 추세지만 예외도 있다. KT는 2014년부터 부장 이하 전 직원을 ‘매니저’로 통일해 부르던 제도를 폐지하고 직급승진제도를 재도입했다.

호칭 파괴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뿌리 깊은 장유유서 문화에서는 언어 습관을 바꾼다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김춘수는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노래했다. 꽃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누구를 무엇이라고 부르느냐’는 건 꽤 중요한, 철학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새롭게 바꿔 부르는 시도가 의미 있어 보이는 까닭이다.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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