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선의 너영나영]

[오피니언타임스=황진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피시(PC)를 열어보지 않고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 암호가 걸려있는 760개 파일을 확인해보지 않고 ‘그 정도면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을까. 판사들은 물론 국민 대부분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재조사한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지난 22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성향을 수집한 문건을 다수 발견했다고 밝혔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4명을 검찰에 고발하고 있다. ©참여연대

판사 동향 수집 문건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다?

행정처 심의관 출신 ‘거점 법관’을 통한 법원의 동향은 물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내부게시판, 포털의 익명 게시판 활용 등의 정보 수집 방법을 제시한 행정처 기획조정실 작성 문건도 확인했다. 그런데도 보수 신문들은 블랙리스트 의혹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썼다. 특정 성향 판사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줬는지 확인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판사들을 사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는 무시하고 덮어버리려고 애썼다.

블랙리스트는 그 소문만으로도 당사자들을 움츠리게 만든다. 판사들의 경우는 ‘윗분’과 행정처의 뜻을 헤아려 자기 검열의 재판을 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법관의 독립을 해친 것이다. 법관의 독립은 사법부의 독립이다. 판사들의 동향을 수집해 문건을 만든 것만으로 범죄다. 특정 성향의 판사에게 불이익이 없었는지도 더 조사해 봐야 안다. 그 입증 책임은 작성자들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원세훈 문건’으로 청와대와 거래 의혹으로까지 번져

추가조사위가 공개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은 더 충격적이다. 문건은 청와대의 요구로 원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의 항소심 선고 직전에 담당 재판부의 동향과 법원 내부 반응을 파악해 보고한 사실을 보여준다. 원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은 다름 아닌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당선할 수 있도록 국정원 댓글부대를 동원한 사건이다. 재판부가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의 유죄 판결을 내리자,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이 ‘사법부에 대한 큰 불만을 표시하며 전원 합의체에 회부해 줄 것을 희망’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실제로 항소심 판결 5개월만인 2015년 7월 무죄 취지로 원 전 국정원장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13대 0의 결정이었다. 2심의 유죄 판결 사건을 대법원에서 단 한명의 소수 의견도 없이 만장일치로 뒤집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해당 문건에는 ‘상고법원과 관련한 중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추진을 모색’이라는 표현도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문건으로 원 전 국정원장 재판을 양 대법원장이 추진했던 상고법원 설립과 연계해 청와대 측과 ‘거래’하려 했다는 의혹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뒤 지난 8월 열린 파기환송심은 원 전 원장에게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을 선고했다.

©픽사베이

김 대법원장 사과와 후속 조치 약속으로 ‘해결’ 물꼬 터

언론이 이런 일련의 과정을 들어 양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와 청와대의 유착 가능성을 보도한 데 대해 현직 대법관 13명이 나선 것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국민의 눈총을 맞을 행태였다. 대법관들은 23일 청와대의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 개입’ 의혹과 관련해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문을 냈다. 청와대가 대법관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양승태 리더십’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제왕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대법원장의 권한을 내려놓겠다는 선언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음날인 24일 김 대법원장이 양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법관 뒷조사와 청와대와 유착·뒷거래 의혹이 불거진 데 대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큰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대법원장으로서 마음 깊이 사과한다”고 밝혀 숨통과 해결의 물꼬를 튼 것은 다행스럽다. 김 대법원장은 “이번 일로 인한 국민 여러분의 충격과 분노, 그리고 실망감이 어떤지 잘 알고 있고, 저 역시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해 사실상 ‘판사 사찰’ 등을 인정했다. “추가 조사위 조사과정에서 나온 문건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이는 ‘블랙리스트는 없었고 상처뿐인 재조사였다’는 보수 언론들의 아전인수식 해석과는 상반된 것이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스마트한 3차 조사 돼야

김 대법원장은 추가조사위 조사결과를 보완하고 후속 조처를 논의할 기구 구성을 약속했다. 3차 조사에 나설 뜻을 밝힌 것이다. 3차 조사는 ‘임종헌 PC’와 760개 파일을 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블랙리스트 의혹을 진실하고 솔직하게 규명해야 한다.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덮으려 하다가는 검찰이 강제 수사토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블랙리스트 조사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김소영 법원행정처장 후임으로 임명된 안철상 대법관의 어깨가 무겁다. 판사들 대부분은 검찰의 강제 수사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법부가 뿌리째 흔들릴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검찰 수사에 상응하는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저인망식이 아니라 환부를 찾아 도려내는 스마트한 조사와 후속 조치가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준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느냐이다. 

 황진선

 오피니언타임스 고문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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