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영화 ‘1987’을 보았다. 그해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연세대생 이한열 군 최루탄 사망사건까지 6개월간의 한국 현대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고 문익환 목사(1918~1994)가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가 끝날 즈음 문 목사가 “전태일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하며 20여명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선 나도 몰래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30년 전 그때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이한열 군 노제(路祭)가 열리던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직장인들까지 1백만 군중이 모였다.

6.10항쟁이 있던 1987년의 봄과 30년 후인 2017년의 봄은 많이 닮아 있다. 1987년은 박종철 군 사망(1.14) 후 6개월 만에 민의가 승리하는 6.29 선언을 쟁취해 냈고, 2017년의 봄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밝혀진(10.24)지 6개월 만에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것은 수백만 촛불민심이 싸워 이긴 결과 얻어낸 초유의 혁명적 대사건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2016년 10월29일 처음 시작된 촛불집회는 6개월만인 이듬해 4월29일 제2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것이 나라냐!“며 6개월 동안 추운 광장을 밝혔던 성난 촛불 민심은 19세기 동학혁명 이래 최대, 최장의 자발적인 민중집회였다. 1987년의 봄과 2017년의 봄은 각각 6개월 만에 민의를 달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닮은꼴을 보여주고 있다.

꽃다운 청춘들의 죽음은 범국민적인 6.10항쟁의 직접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전국에서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범국민 규탄대회’가 열렸고, 잠실체육관에서는 노태우 대표가 제13대 민정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날 전국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3주 가까이 이어졌다.

이에 전두환 권부는 비장의 카드로 군부 동원 계획까지 세웠지만 수도권의 핵심 지휘관들이 이를 거부하고 나서는 바람에 작전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87년 13대 대선에서도 종전과 같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 선출 방식을 고수하겠다던 전두환의 ‘4.13호헌’ 발표이후 전국의 민심은 폭발직전까지 다다랐다. 정부는 그때서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 이름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사실상 대국민 항복 선언이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몇몇 인물들의 용감한 행동으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현 성균관대 교수)는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4과장으로부터 서울대생이 고문 받다 죽었다는 정보를 단독으로 입수, 보도함으로써 이를 세상에 처음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이 사실을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 국민을 속였다. 그러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 군의 시신을 최초로 검안한 오연상 내과의는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고 증언함으로써 단순 쇼크사가 아니라 물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의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끈질긴 기자정신을 발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낸 사람이 동아일보의 황호택(전 동아일보 전무)·윤상삼(작고) 두 기자다. 신성호 등 이들 3명의 기자들은 그 공으로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한국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박 군의 시신을 ‘부검 없이 화장(火葬)하자’며 덤비는 경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법대로 부검을 실행에 옮긴 서울지검의 최환 공안부장, 박 군의 사인(死因)을 의사의 양심에 따라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목이 욕조 턱에 눌려 숨이 막혀 죽은 것)라며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기록으로 남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부검의(현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 이들의 양심과 직업윤리가 바로 서지 않았더라면 정의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부검의의 행동은 2015년 11월 광화문 시위도중 경찰의 직사(直射) 물대포를 맞고 숨진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외부 요인에 의한 외인사(外因死)가 아니라 병사(病死)라고 진단, 서울의대생들로부터 비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은 바 있는 서울대학병원 관계자들의 비윤리적인 행위와는 대조적이다.

이들 외에도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한 인물은 더 있다. 경찰의 축소·은폐 시도를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에게 제보하고, 그 사실을 옥중서신(영화에서는 ‘비둘기’)에 적어 재야인사 김정남(김영삼 청와대 교문문화 수석)에게 전달한 영등포 교도소 전·현직 교도관들, 이부영의 메모를 받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전달한 김정남, 이를 폭로하고 범국민 규탄대회를 주도한 김승훈 신부 등은 전두환 7년의 폭압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공로자들이다.

영화 1987 스틸컷

영화에서 대공처장이 직속상관인 치안본부장을 대하는 태도와 대공처 경찰이 공안검사에게 하는 반말 비슷한 말투 등은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다. 박 처장이 강 본부장에게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기자들에게 이렇게 발표하시라요!’하며 명령조로 말하는 장면, 또 그의 부하 경찰들이 집단으로 검사 방에 들어가 ‘오늘 중 반드시 화장을 해야 한다’며 협박성 발언을 하는 모습 등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들이다.

물론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탓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5공화국 정권을 지탱해 준 두 집단은 역시 군과 검·경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집단은 국토방위와 치안유지라는 본연의 신성한 책임과 의무보다는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성이 더욱 발휘되던 시대였다.

영화에서 대공처장은 “내 간첩 잡는 거 방해하는 놈, 그놈을 바로 간첩으로 간주하갔어”하며 기염을 토한다. 또 “고문 받다 죽으면 월북하려다 아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지”라고 말한다. 멀쩡한 사람 잡아 고문할 때 그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면서 “협조하면 애국자, 저항하면 월북자”가 된다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협박한다.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장사가 없다.

그 때는 국가보안법이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어 그 어떤 헌법상의 기본권도 ‘국가보안’이라는 수식어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던 시대였다. 군과 검·경은 권부의 입장에서는 체제와 정권안보에 가장 유용한 수단이고, 힘없는 국민들에게는 공포스런 존재로 비쳐졌다. 두 집단이 오랜 동안 국민으로부터 외면, 불신 받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를 본 뒤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민중이 억압받던 30년 전 그 시절을 오히려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987’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고, 또 보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국내 주요 신문들도 당시의 상황을 다룬 시각은 각기 달랐다. 그 시절의 기사를 찾아 비교해 보라. 똑같은 사건을 놓고 각 신문들은 어떻게 사실을 보도했고, 어떤 논조로 사설과 칼럼을 썼는지 말이다.    

 김준범

 (주)대한공론 상임 고문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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