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현의 상호의존 시리즈2

우리는 신문/뉴스를 열심히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보도되는 쫀쫀하고 근시안적인 ‘사건’들이 나라/개인의 운명을 바꾼다고 생각하십니까? 몇 달 후에 돌이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나라/개인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역사의 저류(底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저류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역사를 바꾸는 최대의 저류는 무엇일까요? 필자는 “투쟁에서 상호의존으로” 가는 개벽(開闢)이 그러한 저류라고 생각합니다. 이 개벽에 선도적으로 적응한다면, 한국은 2000년대의 로마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를 앞서 가는 “상호의존 선도국가” 한국의 청사진을 봅시다. 이는 꿈만은 아닙니다.

1. 역사의 ‘저류’를 읽자
2. 투쟁의 시대가 가고, 상호의존의 시대가 온다
3. 상호의존은 신의 해법(解法)이다
4. 전쟁은 남는 장사가 아니다
5. 투쟁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6. 상호의존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다
7. 신(神)의 선물(상호의존)에 배달사고가 났다
8. 삼국지(三國志)를 보지 말자
9. 이제 한국의 비교우위는 상호의존이다

이 시리즈의 기고자 서용현 교수는 댓글 및 논쟁을 환영합니다. 이 메일 주소는 sirjose@daum.net입니다.

역사의 개벽이 오고 있다

나는 세계를 바꾸고 있는 최대의 개벽(開闢)이 “투쟁의 시대가 가고,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시대가 오는” 변화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투쟁을 잘해야 잘 사는 것이 아니고 협동해야 잘 사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투쟁에 ‘중독’되었다. 그래서 우린 이 역사의 개벽(開闢)을 못 본다.

인간의 역사는 먹고 먹히는 투쟁의 역사였다. 싸움 잘하는 쌈닭들이 지배하는 짐승의 역사였다. 신(神)은 이 역사가 ‘만물의 영장‘에 걸 맞는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계에 개벽(開闢)을 가져와 인류사의 방향을 틀어버리고 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신의 구상은 간단하면서도 원대하다. 여태까지 인류사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은 투쟁이다. 그런데 신은 이제 ‘투쟁의 시대’를 끝내고 ‘상호의존의 새 시대’를 열고자 하신다. 그래서 투쟁을 일삼는 인간은 도태시키고 ‘함께 살 줄 아는’ 착한 인간은 잘 살게 하여 ‘신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상호의존을 가속시킨 것은 세계화와 정보화다. 세계화는 세계의 벽을 허물고 세계를 좁게 만들어 공동체(共同體)로 나아가게 한다. 인터넷은 사람/나라의 평판을 세계에 전파시켜서 투쟁적인 사람/나라의 정체를 노출시키고 이기적인 사람/나라를 매장시킨다. 즉, 인터넷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투쟁의 시대를 조용하게 끝장내는 상호의존 왕국의 ‘투명의 기사(騎士)’다. 정보화와 세계화 자체를 개벽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보화/세계화는 상호의존을 초래하는 ‘기술적 수단’에 불과하다. 반면에 상호의존은 ‘사고방식의 변화’다. 예컨대 “져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은 새로 나온 스마트폰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즉, 상호의존이 정보화/세계화보다 어려운 시험문제다. 결국 사람/나라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마음으로 상호의존을 수용하느냐“ 여부이다.

투쟁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류가 추종해 온 ‘생존의 기본규칙’이다. 이것이 바뀐다는 것, 즉 투쟁 대신 상호의존이 인간/국가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된다는 것은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하면 산업혁명이나 지리상 발견 등은 개벽 축에 못 낀다. 중생대가 신생대로 가던 개벽,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가던 변화도 비교가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들은 ‘물질적인 변화’였지만 상호의존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각’을 바꾸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상호의존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투쟁과 상호의존은 역사 속에 함께 있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투쟁적 측면과 상호의존적 측면이 공존해왔다. 지난 5천년 역사는 투쟁이 주류였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이래 상호의존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제 상호의존이 주류가 되고 있다. 이 차이는 크다. 이제 투쟁 대신 상호의존이 인간/국가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된다는 의미다. 이것이 상호의존을 향한 ‘대세(大勢)’다.

세계를 인터넷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듯이 상호의존의 대세도 돌이킬 수 없다. 토마스 홉스는 인간세계의 현실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struggle by all against all)”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것이 호랑이 담배 피던 ‘투쟁의 시대’의 옛 이야기라고 본다. 전형적인 낡은 패러다임이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정보화 및 상호의존의 대두를 보지 못하고 한 얘기다. 새 시대의 현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상호의존”이다. 홉스여, 안녕!

©픽사베이

나라/사람은 왜 흥했다 망했다 하는가?

미래에는 상호의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나라/사람이 뜬다. 반면에 낡은 투쟁의 타성에 매어있는 나라/사람은 기운다. 나라/사람은 왜 흥했다 망했다 하는가? 역사의 저류(低流)를 보지 못하여 시대변화(상호의존)에 적응하지 못하면 망한다. 역시 찰스 다윈이 맞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는 강한 자도 영리한 자도 아니다. 그는 상황변화에 적응할 줄 아는 자다.”

이집트에 가면 피라미드 근처에서 박쉬쉬(푼돈)를 달라고 구걸하는 이집트인들을 수도 없이 만난다. 그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고대 이집트문명을 건설한 이집트인과 지금의 이집트인이 같은 종족 맞어?”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이다. 좀도둑과 사기꾼이 많은 이탈리아에서 외국의 여행객들은 지금의 이태리 사람들이 그 찬란했던 로마의 후손인지에 관해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의 이집트인은 분명히 고대 이집트인의 자손이고, 지금의 이태리인은 로마인의 후손이다. 징기스칸의 대몽골제국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페르시아 제국이나 오스만 터어키의 후예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이들은 모두 시대의 흐름에 적응할 때 떴다가, 적응하지 못할 때 망한 것이다.

인간은 타성의 동물이다. 그래서 투쟁의 타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인류는 ‘군주제’라는 “말도 안 되는 타성”에서 벗어나는데 수천 년이 걸렸다. 투쟁은 반만년 인류역사의 타성이다. 따라서 투쟁의 타성에서 탈출하기는 군주제 탈출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군주제에서 먼저 탈출한 나라들(영국, 미국 등)이 새로운 지평을 열었듯이, 투쟁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에서 탈출하여 상호의존이라는 개벽을 용기 있게 수용하는 극소수의 나라와 개인은 엄청난 도약을 할 수 있다.

상호의존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개벽의 역사에서는 어떤 변화도 가능하다. 불사(不死)인줄 알았던 강대국이나 대기업이 몰락할 수 있다. 새로운 별들이 혜성처럼 나타날 수도 있다. 과거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북아메리카로 건너간 세계문명의 중심이 다시 이동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빛은 다시 동방으로 간다, 한국이 혜성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데올로기에 관해서도 오늘날 절대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민주주의나 시장경제가 도전받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마도 50년 후의 세계의 정치지도, 경제지도는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이다. 투쟁에서 상호의존으로 가는 과도기에 얼마나 적응을 잘 했느냐, 숙제를 잘 했느냐에 따라 국력에 큰 차이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50년 후에 보자. [오피니언타임스=서용현, jose] 

 서용현, Jose

 30년 외교관 생활(반기문 전 UN사무총장 speech writer 등 역임) 후, 10년간 전북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중.

 저서 <시저의 귀환>, <소통은 마음으로 한다> 등. 

‘서용현, Jose’는 한국이름 서용현과 Sir Jose라는 스페인어 이름의 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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