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의 촌철살인]

[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최근 잇따라 터지고 있는 문화예술계의 성희롱, 성폭력 폭로를 보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이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는 돈을 위해 전당포 노파와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하는 죄를 짓는다. 노파가 자기만 알고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벌레’ 같은 존재이며, 죽여도 아무 죄가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살인을 저지른 뒤 그는 죄책감과 정신적 혼란에 시달린다.

번민하던 그는 매춘부 소냐를 만난다. 소냐는 말한다. “지금 당장 네거리로 나가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 맞추세요. 그리고 세상사람 모두에게 들리도록 ‘나는 살인자올시다!’라고 외치세요.” 마침내 그는 소냐의 말대로 행동하고 경찰에 자수해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작가가 소설 제목을 ‘죄와 벌’로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건대 ‘벌’은 시베리아 유형이 아니었다.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것, 그게 첫 번째 벌이었다. “죄짓고 못 산다”는 우리 속담과 딱 맞아떨어지는 선명한 주제의식이다. 죄를 지으면 불안과 가책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므로 이미 지은 죄는 털어놓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이치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성희롱·성폭력이란 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어떤 것일까이다. 그들이 ‘죄와 벌’의 주인공처럼, 우리 속담대로 죄책감에 괴로워했을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런 것 같다. 사과에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당수는 그런 것 같지 않다. 부인·침묵하거나 사과를 해도 진실성이 의심되는 형식적 사과에 그쳤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경우가 그래 보인다. 그는 문제가 불거진 뒤 이렇게 말한다.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18년 가까이 진행된 극단 생활에서 관행적으로 일어난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연합뉴스 TV 캡처

여기서 ‘관행적으로’를 ‘일상적으로’라는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성추행·성폭행이 이 분야에서도 관행적으로, 일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다. ‘도끼 살인’만큼 끔찍하지는 않지만, 당하는 여성으로서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범죄가 그에겐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해온 연출가 오동식씨도 내부고발을 했다. 이씨의 성추행이 폭로된 후 극단 차원의 대책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다고 한다. 이씨는 성폭행 피해를 폭로한 전직 단원을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발언을 했다. 기자회견을 앞두고는 ‘불쌍한 표정’을 짓는 리허설을 했다. 이렇게 가식적 사과를 해놓고 참회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이른바 문화권력이란 지위도 이들의 관행적 성폭력에 일조했다. 문화권력에 침묵의 동조자들이 가세하는 방식이다. 연희단거리패 김소희 대표는 이씨의 행태를 알고 있었다면서도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씨에 대한 소문이 연극계 전반에 파다했지만 비판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알량한 문화권력에 대한 집착이 만만치 않은 ‘죄’를 낳았다.

이런 식으로 형식적이고 불완전한 사과 ‘코스프레’를 하면 어물어물 넘어간 것이 성추행이 끝도 없이 반복되고 확산되는 원인이 됐다. 오늘날 미투(#MeToo)운동이 문화예술계, 종교계 등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도 이런 고삐 풀린 문화권력을 방치한 결과라고 본다.

성폭력·성희롱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당사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으로 사죄하고 참회하는 일이다. 제도 개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뻔뻔한 태도가 만연한 사회다. 우리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부족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 뇌의 앞부분 이마 쪽에는 전두엽이 있다. 이것이 판단과 논리, 지능, 의지, 영성과 도덕성, 즉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들을 관장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은 전두엽이 작거나 약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불가피하게 사과해야 할 일이 생긴다. 그때 잘 사과해야 한다.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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