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말머리]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오랜만에 루쉰 소설을 다시 꺼냈다. 루쉰의 글을 읽다 보면 인의도덕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관점이 느껴진다. 인의도덕 자체는 분명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인의도덕으로 표상되는 ‘냉혹한 봉건 도덕’이 폭력과 공격의 논거로 활용되는 습속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방황(彷徨)』의 「복을 비는 제사(祝福)」에는 이러한 봉건 도덕의 희생양이 나온다. 바로 샹린댁이다. 중문학자 이종민 교수는 “『방황』은 박탈당한 존재들의 침묵을 다시 소리로 번역하고 재생한다”고 말했다. 샹린댁이 바로 ‘박탈당한 존재’의 상징이 아닐까?.

“하지만 몰래 숙모에게 저런 사람은 가엽긴 하지만 풍기를 어지럽힌 사람이니 일은 거들게 하되, 제사 때에는 손을 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또한 음식은 모두 손수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조상들이 잡숫지 않을 거라고 했다. (…)
‘샹린댁! 가만둬, 내가 가져올 테니.’” (…)

“‘지금에 와서, 자네는 두 번째 남편과는 이태도 살아보지 못하고 죄명만 뒤집어쓴 꼴이 되었어. 생각해 봐, 자네가 죽어서 저승에 가면 귀신이 된 두 남자가 서로 차지하려고 다툴 터이니, 자넨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염라대왕은 자네를 톱으로 잘라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수밖에 없을걸. 그렇게 되면 정말…….’
그녀의 얼굴에는 금세 두려움의 빛이 드러났다. 이런 얘기는 산골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 루쉰 「복을 비는 제사(祝福)」 中

©픽사베이

사람들은 샹린댁의 반복되는 옛 이야기에 싫증을 느끼고 그녀를 멀리한다.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만큼 과거의 기억이 그녀에게 지독한 상처를 새겼던 것이리라. 이는 필시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한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다. 반복강박이란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감정을 계속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저는 정말 바보였어요, 정말…….’ (…)
샹린댁은 그 얼빠진 듯한 눈을 쳐들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눈이 올 때만 짐승들이 산속에서 먹이가 떨어져 마을로 내려온다고 알고 있었어요. 봄에 도 나온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어요. (…) 나가서 살펴보니, (…) 우리 아마오는 없었어요. (…) 좀 들어가 보니 과연 풀숲에 쓰러져 있었어요. 뱃속의 창자는 몽땅 먹혀 버렸고, 손에는 아직 그 조 그만 바구니를 꼭 쥐고 있었어요…….’”
- 루쉰 「복을 비는 제사(祝福)」 中

샹린댁은 위와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내 마을 사람들은 듣는 것조차 넌더리 치며 그녀의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약한 사람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봉건 도덕은 샹린 아줌마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독한말을 그녀에게 던지며 모든 희망을 앗아갔다. 봉건 도덕이 사람을 해한 것이다. 이는 루쉰이 「광인일기」에서 이미 소리쳐 외친 그것이다.

「광인일기」 속 “역사책에는 연대가 없고 비뚤비뚤 페이지마다 온통 ‘인의도덕(仁義道德)’이라는 몇 글자가 쓰여 있었다. (…) 비로소 글자들 사이에서 글자를 찾아냈으니, 책 전체가 온통 ‘식인(食人)’이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중문학자 송철규 교수의 지적처럼, “‘인의도덕’이란 번듯한 말을 앞세운 봉건의 역사야말로 ‘식인’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렇듯, 유교 이데올로기는 ‘쓰레기차 톱니바퀴’(박남용, 『소래 포구에서』)처럼 모든 것을 죄다 집어삼켜버렸다.

©픽사베이

김경일 교수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그에 따르면, “처음부터 거짓을 안고 출발했던" 유교는 “‘힘 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는 선언한다. 유교의 유효 기간은 이제 끝났다고!

루쉰 작품 속 배경은 고루한 유교 사회 그 자체이다. 「복을 비는 제사」에서 사람들은 유교적 봉건 질서에는 별 다른 의심을 품지 않으면서, 샹린댁에게는 냉정하게 언어폭력을 휘두른다.

오늘이라고 다른가. 아직도 ‘여자가 그래도 ~해야지’라는 문장을 별 다른 성찰 없이 쓰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여성이 명백한 피해자일 때에도, 상황 외적인 이슈를 침소봉대해 문제의 본질을 흐리곤 한다.

루쉰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예견했을 리 없으나, 그의 소설이 주는 메시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적잖은 여성들이 보이는 모종의 반복강박 증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제 ‘식인의 역사’를 끝내야 한다. 

 석혜탁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대학 연극부 시절의 대사를 아직도 온존히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낭만주의자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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