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완의 애, 쎄이!]

[오피니언타임스=우디] 4남매 중 막내인 작은외삼촌이 고등학생 때였다. 외삼촌은 담배를 피다가 몇 번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렸는데, 그 횟수가 꽤 늘어나자 어머니를 모셔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어떻게 말을 하지. 그런 고민과 걱정 사이에서 선생님의 으름장은 자꾸만 커져갔고 외삼촌은 할 수 없이 외할머니에게 말을 꺼냈다.

외삼촌은 외할머니에게 아주 크게 혼이 날거라고 최악의 수를 몇 번이나 생각하면서 교무실 밖에서 기다렸다. 몇 분 후에 선생님과 면담을 마친 외할머니가 조용히 삼촌 앞에 나타났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별로 없으신 외할머니는 삼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많이 피지는 말래이” 딱 그 한마디만 하셨다고 한다. 이제는 외삼촌이 고등학교 3학년 막내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삼촌은 아직도 그 날의 외할머니가 대단하기도 하고 무슨 생각이셨을까,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픽사베이

말(馬)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깊이 새겨들으신 모양인지 외할머니는 대구 칠성동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4남매를 모두 서울로 올려 보냈다. 제일 먼저 큰 아들을 보냈고, 그 다음에는 큰 딸과 작은 딸인 지금의 우리 엄마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막내아들까지 차례로 상경시켰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1~2살 무렵 돌아가셨다. 엄마는 대구 본가에서 나를 낳았다. 내가 갓난쟁이였을 때의 대구 할머니 댁은 자글자글하게 북적이는 때였다. 내 얼굴의 핏기가 가시고 엄마가 몸을 좀 추스렸을 즈음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고, 외할아버지는 아주 멀리 떠나셨다. 서울살이가 지칠 때마다 자식들은 대구 집을 찾았지만 장성한 자식들은 외할머니 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성인이 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 모습이 서서히 달라졌다. 그게 사는 거라고, 다 그렇게 산다고, 그게 인생이라고 잘생긴 남자배우가 드라마에서 읊조렸다. 북적북적하던 집이 서서히 고요해지는 때였다.

밥알도 제대로 못 넘기던 내가 걷기 시작하고 말을 하고 학교에 들어가고 수능을 보고 주민등록증을 받고 연애를 하고 취업준비를 하는 시간 동안 외할머니의 삶도 동일하게 나아갔다.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때마다 전국각지 여행을 다니고, 노인정에 자주 나가서 화투를 쳤다. 큰며느리가 사준 밍크코트를 입고 서울에 놀러왔고, 예쁜 블라우스를 입고 서울로 올라온 지인들을 만났다. 큰아들의 딸이 대학을 가고 난 뒤에는 손녀와 백화점도 자주 다녔다. 큰 딸의 집에도 몇 번이나 들렀다.

둘째아들인 아버지와 셋째 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냥 명절에 만나는 어른, 우리 엄마아빠의 부모님, 그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른을 대하는 법을 잘 몰랐다. 일단 어른은 공경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노약자 석에는 절대 안 앉았고, 어르신이 내 앞에서 서면 벌떡벌떡 일어났다. 가끔씩 젊은이가 참 착하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떤 감사를 해야 할지 너무나 어려워서 그냥 웃고 말았다. 할머니의 팔짱을 끼고 백화점을 다니던 외사촌 언니는 할머니에게 살갑게 굴었다. 외사촌 오빠도 할머니와 여행을 가면 셀카를 자주 찍었고, 때때마다 안부전화를 했다. 언제나 즐겁고 듬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언니와 오빠이기에 쑥스러움이 많은 나는 영원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심 한편으로는 외할머니의 길쭉길쭉한 손이 내 머리 위에도 얹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달 초에 외할머니를 우리 동네 요양원으로 모셨다. 외할머니는 더 이상 혼자서 삶을 꾸릴 기력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버스를 타면 5분이면 가고, 걸어서는 15분정도면 갈 수 있는 곳에 있는 요양원이었다. 평생을 의성과 대구에서만 보내신 할머니는 가끔씩 지금 이곳이 서울인지 대구인지 헷갈려했고, 내가 외할머니에게 찾아가면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표는 몇 시냐고 물었다. 외할머니에게 서울은 낯선 곳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밍크코트를 입고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부천에서 영등포로, 영등포에서 수유리로 오갔어도 외할머니의 집은 대구 칠성동이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할머니를 모시고 온 날 작은외삼촌의 어깨는 하염없이 내려앉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조카가 ‘제가 매일 외할머니에게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큰소리 떵떵쳤지만 작은 외삼촌의 얼굴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외할머니를 서울로 모신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작은 외삼촌은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요양원을 한참 알아보고 다닐 때에 자꾸만 표정이 어두워지는 엄마와 내 앞에서 사회복지사가 말을 했다.

“가끔 아드님들이 술에 잔뜩 취해서 밤에 찾아오곤 해요. 내가 돈이 없어서 엄마를 여기 버려놨다고, 그렇게 한참을 울고 돌아가요. 근데 요양원이 별다른 게 있나요? 그냥 어르신들이 모여서 사시는 곳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다들 바쁘잖아요. 내 아이도 맡기고 일하러 가야 하는 때에요. 힘들어 하지 마세요. 이게 사는 법이예요.”

밤을 삶아서, 호두과자를 사서, 시루떡을 사서 나는 외할머니에게 간다. 아직 취업준비생이라서 시간은 텅텅 비고, 매일 하나씩 무언가를 잊어버리시는 외할머니가 하나라도 더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간다. 이제야 겨우 외사촌 언니오빠처럼 능글능글하게 외할머니 앞에서 웃는데, 외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나보다 더 많이 웃어준다. 내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할머니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나는 정말 느렸고, 외할머니는 너무 빨랐다.

“젊은 아가 바쁜데 뭐할라꼬 자꾸 오냐”며, “돈은 언제 벌어서 언제 할미 용돈 줄 거냐”고, “돈은 언제 벌어서 언제 시집 갈 거냐”고 외할머니는 자꾸만 물으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랑 같이 살 건데, 그리고 나는 금방 부자가 될 거니까 걱정마!”라고 대답한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는 한숨을 푹푹 내쉰다. 빨리 어디라도 취업이 됐으면 하는 표정을 보인다. 어느 날은 할머니의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잔뜩 웃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어느 날은 집에 언제 가냐며 따라나서는 할머니 덕에 집으로 돌아오는 10여분 동안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가끔씩은 너무 많이 울고, 가끔씩은 더 냉철해지고 단단해져야 한다고 기합을 넣지만 고개 숙인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알 수 없는 무게이다.

자식들이 장성해서 모두 떠난 대구의 작은 집에서 외할머니가 꾸려나가신 삶의 시간이 딱 내 나이 정도다. 핏덩이였던 내가 외할머니에게 다가가는 동안 외할머니는 서서히 대구에서 서울로 오고 계셨던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른이 되었다고 으쓱거리고 새벽에 하염없이 무서워서 엉엉 울다가도 외할머니의 길쭉한 손마디를 생각하면 나는 너무나 무력해지고 또 한편으로 너무나 편안해진다. 막연한 ‘다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쉽게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요새 그 알 수 없음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감정과 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앞으로 어디로 걸어갈지, 막막할 때마다 외할머니의 하얗게 샌 머리칼을 떠올려본다. 내일은 외할머니에게 요플레를 사다드릴 생각이다. 

 우디

 여행, 영화, 글을 좋아하는 쌀벌레 글쟁이.
 글을 공부하고, 일상을 공부합니다.
 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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