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봉선사의 하마비, 왕릉과 함께 조성된 원찰의 이해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남양주에 자리한 ‘봉선사’를 들렀다. 봄이 오는 사찰의 경내는 나름의 운치와 소박한 멋이 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걷던 나의 눈에 한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비석의 이름은 ‘하마비(下馬碑)’로, 그 순간 왜 사찰에 하마비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보통 하마비는 말에서 타고 가던 사람도, 비석이 세워진 곳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던 것을 상징하는 비석이다. 조선시대 하마비는 대개 궁궐이나 왕릉, 향교나 서원 등에 세워졌는데, 대개 유교적인 것을 지키기 위한 장소나 건축물 등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마비를 지날 때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을 ‘범마(犯馬)’라고 해서 실제 처벌했던 사례도 있어, 의외로 상징성이 있는 비석이었다.

봉선사에서 볼 수 있는 하마비,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階下馬)’라 새겨져 있다. ©김희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 해서 불교가 박해받던 시기였던 것을 생각하면, 봉선사에 하마비가 세워진 모습은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봉선사에는 왜 하마비가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시선을 넓게 볼 필요가 있는데, 바로 봉선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릉(光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릉은 세조(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 이하 정희왕후)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봉선사는 세조의 원찰이었던 것이다.

정희왕후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봉선사 느티나무와 하마비의 모습 ©김희태

‘원찰(願刹)’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세운 사찰로, 의외로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원찰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불교가 확산이 되면서, 장례에 있어 화장의 성행과 이러한 원찰이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신라에서 이러한 사례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스스로를 불국토의 나라로 칭했던 신라는 문무왕의 원찰인 ‘감은사(感恩寺)’와 성덕왕의 원찰인 ‘봉덕사(奉德寺)’,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 등이 세워졌다. 이외에도 많은 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 세워졌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찰은 신라왕릉의 위치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현륭원의 원찰로 조성된 용주사, 사찰임에도 홍살문과 함께 외삼문이 설치된 특이한 경우다. ©김희태

원찰은 의외로 조선시대에도 성행했다. 얼핏 ‘숭유억불’의 시대라는 점과 비추어 보면 의아한 대목이지만, 의외로 불교에 꽤 호의적인 왕들이 많았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소설 등의 ‘패관문학’을 잡스러운 것으로 표현했던 ‘정조(재위 1776~1800)’는 이를 근절하기 위해 유학을 더욱 장려했다. 이런 정조조차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룽원의 원찰로 ‘용주사(龍珠寺)’를 세운 것을 보면 조선시대의 불교는 왕실의 후원 속에 명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원찰로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과 원찰인 ‘흥천사(興天寺)’, 세종의 ‘영릉(英陵)’과 원찰인 ‘신륵사(神勒寺)’, 성종의 ‘선릉(宣陵)’과 중종의 ‘정릉(靖陵)’의 원찰인 ‘봉은사(奉恩寺)’ 등이 있다.

세조의 원찰인 봉선사, 광릉이 조성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김희태

이 가운데 스스로 ‘호불군주’를 자처했던 세조의 원찰이 바로 ‘봉선사(奉先寺)’였다. 봉선사가 있던 자리는 본래 ‘운악사’가 있던 곳으로, 조선이 건국되며 불교에 대한 박해 속에 폐사지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세조의 광릉이 인근에 조성되면서 봉선사는 극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당시 정희왕후는 봉선사를 89칸으로 크게 중창한 뒤 세조의 치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동종을 발원했다. 이 동종이 바로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호)으로, 불교가 박해받던 당시를 생각하면 수준 높은 동종이 만들어진 것 역시 의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종(재위 1468~1469)은 직접 봉선사에 편액을 내렸는데, 세조의 능침을 수호하고, 명복을 비는 원찰의 성격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희왕후의 발원에 의해 만들어진 봉선사 동종, 봉선사 곳곳에서 세조와 정희왕후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김희태

봉선사에는 세조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御室閣)’이 있었다고 했는데, 왕실에서는 봉선사의 주지를 ‘봉향판사(奉香判事)’로 봉해 어실각을 관리하게 했다. 이는 양반이나 유생들이 봉선사에서 난리를 피우지 못하도록 힘을 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봉선사에 하마비가 세워진 모습은 사찰이지만, 향교나 서원만큼이나 이곳을 존중하라는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하마비이지만, 사찰 속에 하마비가 세워진 이색적인 모습을 통해 왕릉과 원찰, 그리고 왕실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김희태

 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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