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후배 Y군은 나를 무척 따랐다. 나도 그 후배를 무척 좋아했다. 남자답고 서글서글한 성품에 항상 웃는 인상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던 사람이라서도 그랬겠지만 어쨌거나 나를 좋아해주니 나도 그를 좋아하는 것이 ‘의리’가 아니겠는가.

내 꼴도 심상찮게 생긴 처지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여간 찜찜하지 않으나, 그 후배의 용모는 특이한 생김새로 조합과 배열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느껴졌다. 178cm로 큰 키에 속했던 그는 일본의 프로레슬러 출신의 중의원이었던 안토니오 이노끼를 닮았다. 이마는 세금폭탄 김모 교수를 닮아 뒤통수까지 벗겨졌고, 부리부리한 눈과 벌쭉한 귀는 조병옥 박사를 닮았다. 아래턱까지 길게 뻗은 구레나룻은 엘비스를 연상케도 했지만 정리가 안 된 편이었다.

그는 학군단(ROTC)의 군사 훈련과정을 끝내고 대학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됐다. 군번은 79-0030x였는데, 앞 번호는 임관년도, 뒷번호는 임관 전 임관소사라는 종합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니까 이 후배는 학군장교 임관석차가 10위 이내라는 뜻이니 일종의 수재라고 볼 수 있었다.(이같은 군번부여는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지적으로 2017년부터는 가나다순 등으로 매겨진다.)

임관 후 그는 최전방 00사단 수색대대에 근무하며 자신은 군대체질이라며 ‘말뚝 박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고, 그동안 받은 훈장이나 표창을 미루어 볼 때 군인으로서 미래를 걸어볼만하다고 주변에서도 권했었다. 학군장교의 복무기간은 28개월이었으니 임관한 다음 다음해 6월 30일이 전역일이었지만 그는 중위 진급 때쯤 장기복무를 신청했다. 드디어 그는 직업군인이 된 것이다.

직업군인이 되니 그전에 보던 그와는 사뭇 달랐다. 진짜 군인이 된 것이다. 엉망이라고 생각했던 얼굴의 조합과 배열은 군대식으로 정렬되어 호남, 미남으로 바뀌었고, 늘 정리가 안됐던 구레나룻은 완전히 자리 잡아, 초등학교 때 열심히 보던 외화 ‘컴뱃’의 주인공 손더스 중사나 헨리 소위처럼 완벽한 군인으로 보였다. 전투복에 총을 들고 전방을 째려보는 그의 사진을 보면 소년시절 부러워했던 군인의 실체, 그것이었다. 그가 부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비무장지대 수색 중 대인지뢰를 밟았다. 이른바 ‘발목지뢰’를 밟은 것인데, 거짓말처럼 오른쪽 발목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바로 후송되어 무려 2년간 수술과 치료, 재활훈련을 거친 후 그는 1983년 대위로 전역했다. 그가 흘린 눈물이며 탄식은 말할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고, 말한들 소용없는, 그야말로 복장 터지는 일이었다.

육군 27사단 공병대대가 지난해 2월 실물폭파훈련에서 적 전차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M19 대전차지뢰를 설치하고 있다. ©육군 27사단

장애인 관련 전문지를 만드는 내가 국제지뢰금지캠페인(ICBL; International Campaign to Ban Landmines)에 가담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분명한 인식과 명분, 실천의지를 갖게 한 것은 Y대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파산이 염려되는 신문사를 떠맡고 있는 현실에서 지뢰금지활동은 이내 한계에 부딪쳤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혼자 설쳐서 될 수도 없는 또 다른 사회운동이요, 장애인운동이요, 군비축소운동이자 국제구호운동이었기에 주변의 뜻있는 인사들을 도와 참여하기 시작했다.

30여년전부터 언제나 튼튼한 후원자가 되어주는 선배, 연세대학교의 J교수가 집행위원장으로 앞장섰다. 그가 나서준다면 걱정할 게 없다. 올바른 가치관과 높은 지성, 완벽한 논리, 주변을 감동시키는 친화력, 치밀한 실천력이 있는 선배이기 때문이다. 그를 집행위원장으로 한 KCBL(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의 활동은 ICBL과 함께 하는 국제적 차원의 캠페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지뢰피해자 구호와 보상을 위한 법제화운동, 궁극적으로 지뢰금지조약 한국가입운동을 통한 민족통일과 평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6.25 전쟁을 치르고도 최신무기로 무장한 200만명에 가까운 남북의 군인들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핵보유국을 사실상 선언한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우리 군의 상황이긴 하지만, 휴전선 일대에 뿌려진 310만개 이상의 지뢰들이 대체 언제 군인들과 민간인의 발목과 목숨을 끊어놓을지 모른다는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이 운동의 시작이다.

판문점 선언으로 남북관계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정전협정이 종전선언, 평화협정이 될 수도 있는 요즘, 휴전선 일대에 날려 있는 지뢰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제거될지 궁금해졌다. 불현듯 가슴 속에 묻어왔던 Y대위가 떠올랐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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