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불덩이... 불길... 하늘과 땅이 들러붙고, 숨소리조차 녹아내려 내가 있는 건지 없어진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던 시간.
거기... 여기... 분별은 이미 소용없고, 남은 자와 간 자의 거리 또한 헛웃음만큼도 인정되지 않던 시간.
오현 스님의 다비식 사진은 그렇게 나를 진정한 몰아(沒我) 상태로 데려갔다.

©픽사베이

沒我...
자기를 없애버리거나 무시해버린 상태.

마음도 생물이라 늘 살아 뒤척이며 피로를 주는 버거움이 컸었다. 그래서 뜨겁진 않아도 속정 깊은 이들 몇을 남기곤 떠나왔고 떠나보낸 긴 시간, 나를 느껴도 되지 않을 만큼 어느새 주변은 잠잠해졌고 그 안에서 나는 식물처럼 살고 있었다. 그것으로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과 회의, 기대와 순간순간 다그쳐지는 열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었다.

그런데 며칠 전, 동인들 단톡방이 요란했다. 이십여 명이 서로 수신자와 발신자가 되어 있는 방.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울려대는 카톡 알림 소리는 이미 익숙했다. 익숙한 만큼 아예 열어보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어느새 서너 명만의 사적 공간이 돼버린 동인 단톡방. 문학에 대한 나눔보다는 그들이 주고받는 신변잡기 일색의 대화에 피로 이상의 불편을 느낀 탓이었다. 단톡방을 나갈까 고민이 깊어진 건 소음과 얽힌 관계에 대해 병적일 만큼 섬약한 나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랬던 내가 왜 동인들 단톡방 창을 열었을까? 분명히 알 수 없는 느낌에 끌려서였다. 과호흡을 하고 있는 임종 환자의 요동치는 가슴처럼 연달아 울리는 카톡 소리. 이미 열 개가 넘는 톡이 들어와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복 승려 같은 생활을 해 오고 있는 선배 시인이 보내온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보았다. 조계종 원로이신 무산 오현 스님의 다비식 사진! 며칠 전 뉴스를 통해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스님으로서의 느낌보다는 유명 시조시인으로서의 오현 스님의 자취가 더 가슴 아팠었다. 그것도 잠시, 오현 스님은 잊혀졌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그 어떤 이의 사망소식도 오래 나를 슬픔에 떨어트려 놓지 않았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다비식이 진행되는 순차별로 이어져 있었다. 불길이 보였다. 중심을 치고 올라가는 뜨거운 노랑과 그 기둥을 감싸고 있는 타오르는 주황 사이사이, 사람의 넋인 듯 흰빛과 그 모든 색이 합쳐진 검은빛으로 땅과 하늘을 덮은 불길...

불기둥이 쓰러지자 다시 드러난 하늘, 그래도 큰 봉분을 이루며 타고 있는 재 무덤 안 여전히 타고 있는 불길들...

마침내 재 무덤도 가라앉고 하얗게 드러누운 백색 세계... ‘백색 세계’ 이상의 어떤 단어도 찾지 못한 낯설고도 신비로운 어떤 세계를 나는 보았다. 뜨거움도 차가움도, 그의 생도 업적도, 그를 맞아줄 세계도 그를 보낸 이곳도, 있었던 것도 없었던 것도, 도무지 알 수 없는...

©픽사베이

‘마음’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엇이 접혔고 무엇이 잘려나간 흔적마저 없는, 분명 나인데도 내가 아닌, 태중의 태아 같은 백색 마음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내 무릎이 저절로 꺾이고 두 손이 모아졌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오현 스님의 명복을 빌지도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한 간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냥 어떤 세계에 이끌리듯 들어와 내가, 내가 아닌 채로, 불길과 재와 고요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몰아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스님의 마지막 법문이 아닐까? 일체의 몰아 상태에서 마음 세상으로 건너가라는 것! 마음은 더하거나 덜해질 수 있는 게 아니고, 갖거나 잃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다치거나 치유될 수 있는 무엇도 아닌, 스스로가 발견하고 그냥 들어가는 것! 들어가서 그냥 함께 사는 것!

찾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일체의 구속을 버리고 마음을 보라. 버리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것도 다른 수를 쓰지 말고 마음의 주머니를 털어내라. 보고 싶은 세상이 있는가? 마음의 화살표를 따라 걸음을 옮겨 보라. 탈출하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마음이 모는 방향대로 숨도 쉬지 말고 뛰어가라.

©픽사베이

마음 세상에서는 ‘마음’이 법전이다. 오현 스님의 다비식 사진을 본 지 만 하루가 지났다. 백색 마음 세상 첫 주민으로서 자칭 타칭 마음 법전을 외운다.

1조 1항, 뜨거울수록 재도 짙다. 다 지나간다. 아무것도 아니다.
1조 2항, 세상에 왔다고 믿지 마라. 언젠가 간다고도 기대 마라. 오고 감은 내가 아니라 시간일 뿐이다.
1조 3항, 세상 일에 그립고 사무쳐하지 마라. 영원한 그리움도 없고 영원한 사무침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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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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