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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부러진 토제마가 발견되는 이유는?[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토제마를 통해 생각해보는 말의 역사적 의미와 이해
김희태 | 승인 2018.07.02 11:50

[논객닷컴=김희태] 지난 2016년 화성 당성의 3차 발굴조사에서는 특이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흙으로 만든 말 인형인 ‘토제마’였다. 그런데 그 모양이 특이했는데, 토제마의 목과 다리가 부러진 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왜 이런 형태의 토제마가 화성 당성, 그것도 구봉산의 정상에 위치한 망해루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것일까?

화성 당성의 망해루지, 2016년 3차 발굴조사를 통해 망해루지에서 다량의 토제마가 확인되었다. ©김희태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말머리 뼈와 ‘呂’자 형태의 제사건물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납동토성의 경당지구 발굴조사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경당지구의 발굴조사 과정 중에서 ‘呂’자 형태의 건물터가 확인이 되었는데, 이 건물의 용도를 제사건물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건물터 옆에서 발견된 구덩이에서 토기 조각을 비롯해 곡물과 동물의 뼈가 발견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말머리 뼈의 출토였다. 예나 지금이나 말은 비싸고 귀한 대접을 받았기에 특수한 목적이 있지 않고는 말목을 자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경주 천관사지의 발굴 현장, 말의 목을 잘랐던 김유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희태

당시 말은 이동의 수단이자 전쟁에 있어 중요한 군수물자였기에 말의 관리는 곧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삼국사기> 근구수왕 조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본래 백제인이던 ‘사기(斯紀)’는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 나게 해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말머리 뼈가 다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44호 건물터가 일반적인 건물이 아닌 제사 용도의 목적으로 사용이 되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풍납동토성 내 경당지구, ‘呂’자 형태의 제사건물터로 추정된다. ©김희태

실제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한 그 해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고 했으며, 이후의 왕들도 사당의 참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국가 차원에서 제사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위의 기록에서 말하는 ‘동명왕’은 부여 건국의 시조로, 백제는 그 뿌리를 부여에서 찾았다. 이는 훗날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에서도 알 수 있으며, 백제 왕의 성씨 역시 부여씨를 칭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화성 당성에서 출토된 토제마가 의미하는 것은?

화성 당성의 망해루지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토제마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토제마가 출토되는 지역을 넓게 그려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이러한 토제마는 전북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과 전남 영암의 월출산 제사유적터, 광양 미로산성 등에서 발견이 되었다. 토제마의 외형은 화성 당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다리와 목이 잘린 외형을 보이고 있다. 이는 말을 제물 삼아 제사의식이 거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데, 당시 말이 귀한 대접을 받았기에 실제 말을 대신해 흙으로 빚은 토제마를 제물로 바치는 형태로 변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망해루지에서 출토된 토제마의 모습, 예외 없이 목과 다리가 부러진 모습이다. ©김희태

이와 유사한 사례를 만두의 기원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이때 남만인들이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풍랑이 풀린다고 했다. 이에 제갈량이 사람을 죽일 수 없어, 사람 머리 모양의 만두를 만들어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 말의 목을 자르지 못하고, 흙으로 빚은 토제마의 목을 부러뜨려 제사를 지냈다는 구성은 만두의 기원과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화성 당성의 망해루지에서 출토된 토제마의 성격은 바다를 통한 교역과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말을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과거에 말은 어떻게 관리가 되었을까? 의외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삼국사기> 온달전을 통해 찾을 수 있다. 흔히 온달이라고 하면 바보 온달로 유명한데, 평강공주를 잘 만나 왕의 사위로 인정받았던 이야기가 널리 전해진다. 그런데 이 온달전을 자세히 보면 말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요지는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말을 사 오게 하는데, 여기서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키우던 말 가운데 병들어 쫓겨난 말을 사라고 말은 한 점이다. 이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당시 말을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점과 국가 차원에서 말을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성 조문국 사적지에 세워진 기마상, 과거 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김희태

또한 말은 외교관계에 있어서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이 되곤 했는데, 이는 439년 장수왕 때 송나라에 말 팔백 마리를 보낸 것에서 알 수 있다. <남사>와 <송서> 등을 보면 송나라가 북위를 치려고 고구려에 조서를 보내 말을 보내라고 했고, 이에 고구려 장수왕이 말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남사>와 <송서>의 내용만 보면 마치 송나라가 고구려에 명령을 해서 말을 받은 것처럼 나오지만, 당시 고구려의 국력과 북위와의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이는 요청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국보 제275호), 의외로 주변에 말과 관련한 문화재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김희태

따라서 화성 당성에서 출토된 목과 다리가 부러진 토제마는 단순한 말 인형이 아닌 과거 말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의 변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이 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장승’은 과거 거리 이정표의 역할을 했고, 지역마다 역참제도가 있어 이동 수단으로서 말은 조선시대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했다. 본격적인 개항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말은 여전히 전략적인 군수물자였고, 말이 귀하던 시절 외교 관계에서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말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가 되는 등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문화재 속에 나타난 말을 통해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토제마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작지 않다고 할 것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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