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송의 어둠의 경로]

[오피니언타임스=서은송] 정영문의 장편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는 독특하다. 실제와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답게, 이야기는 하나의 의식으로 시작하여 여러 의식을 설명하지만 다시 이것들이 연결되는 특별한 구성으로 이뤄져있다.

소설은 과거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의 기억과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러나 5년이라는 시간의 단절이 그리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작가 자신인 동시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인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과거 여자 친구 그리고 그녀의 현재 남자 친구와 잠시 함께했던 때를 떠올린다.

계속해서 제자리걸음 하는 행위를 사랑하는 화자. 나는 이 화자가 너무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이 작품은 ‘만약에 세상에 아나키스트와 예술가, 철학가가 없었다면 과연 많이 팔렸을까’라고 생각할만큼 독자로써 읽기에는 굉장히 지루하고 너무나도 늘어진 책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끝말잇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시작잇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매번 새로운 시작, 시작 또 시작 이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태도의 느낌으로 화자는 끝나지 않는 끝말을 잇는다. 상대가 지루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상관하지 않는 소설 속 화자는 곧 작가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삶의 따분함 속에서 총으로 선인장을 맞추는 행위에서 나왔었다. “녀석은 총이 있는 한 누군가는, 뭔가는 다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라는 표현... 단순히 소설적 행위를 넘어 내가 처한 사회에 투영시켜보았을 때, 제로섬 게임이 판치는 사회가 느껴졌다. 사랑하는 연인사이에게는 이별을 고하는 사람의 총구일 수도, 기업가에게는 제로섬사회에서 살아남아야하는 목표나 수단의 행위가 될 수도 있으리라.

‘사람을 쏘고 싶은 욕망은 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문장이 이토록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지금 누군가를 헤치지 않는 것은 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이 문장에 근거를 지어보자면 나는 말을 할 수 있는 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로써 이미 여러 사람들을 헤쳤다는 결과가 나온다.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의 장르가 무엇일까.

사회비판? 판타지? 기행문? 수필? 장르를 무어라 단정시킬 수 없는 책이다. 논픽션이면서 픽션인 것, 반허구적인 형식을 빌려 작가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쓴 일종의 표류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서평을 쓴 김태환 평론가의 말처럼, 상상을 위한 상상을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단락별로 나름의 조촐한 제목도 구성되어 있지만 일기라고 하기에는 이것이 진짜 작가의 이야기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미가 당겼던 소설이기도 했다. 가는 실이 아주 가늘게 끊임없이 연결되어 한 권의 책을 완성시켜버린 책. 뚜렷하게 드러난 교훈은 없지만 그럼으로써 완성되어버리는 교훈적인 ‘상상을 위한 상상’이라는 책.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의도 같은 건 전혀 없어보였다.

이 책에는 작가가 원했던 것이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파생하고 이탈해 그것들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소설이다”라고 쓰여 있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미 작가와 대화를 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얼마나 무료했는지를 생각했고, 너무도 무료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소설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에 대한 나의 어떤 생각들에 대한 것인 마냥 쓴 이 소설 전체가 내가 느낀 어떤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지겨움을 길게 표현한 것이었다”고.

독자들에게 무책임한 작가. 그는 그렇게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 시대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여행가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지겨움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을 의미있게 만들고 솔직한 자신의 내면을 거침없이 말하는 작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글을 쓰면서도 독자가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들고 각종 문학상을 휩쓰는 작가.

분명히 이 작가의 매력에 내가 단단히 홀린 것일 것이다. 뼈대도 없고 무의식의 의식을 설명하는 이 책에, 내가 작가의 편이 되어서 ‘뼈대가 없는 것이 뼈대’라고 외치면서 무의식속의 의식을 설명하는 것이 작가의 매력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내가 이미 이 작가에게 빠졌기 때문이리라. 모든 글이라는 것이 질긴 욕망의 산물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설명하는 작가는 보기 드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전 칼럼에서 다뤘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은 이러한 작가적 산물을 완벽하게 주장한 작품이기도 했다. 그 외에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 기분을 느끼기란 어려웠지만, ‘어떤 작위의 세계’를 읽으면서 보다 심층된 상상의 산물을 읽고 있다.

정신이 지니고 있는 유희에 대한 어떤 끈을 잡고 길게 이어가는 작품. 무의미하지만 그 무의미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어버린 의미성을 가진 소설. 하필 골라도 이런 작품에 고집을 피우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덕에 이 책을 만나 행복하기도 하다. 사실, 무척 기뻤다. 문예창작과 학생으로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문학 속 장르는 다양하지만 어디서 한번쯤은 봤을 법한 필체와 분위기에 무척 따분했기 때문이다.

책을 거의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 감명과, 다양한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분함을 느끼다 받는 감명은 차원이 다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나를 희곡에 빠지게 한 책이었고 아무래도 그 정점은 ‘어떤 작위의 세계’이리라는 확신이 든다.

흔히들 의식의 흐름으로 글을 쓰지 말라고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그런 말들도 빅브라더가 씌여놓은 또 하나의 프레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빅브라더가 정영문일 수도……. 의식의 흐름을 문학적 지평으로 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어떤 작위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천재가 맞다. 진정한 문학이란 ‘인생에 대한 위로보다는 존재 자체의 절망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소설론이 이 책의 제목대로 어떤 작위의 세계에 대해 항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념와 실재, 사실과 상상이 경계 없이 이어지는 소설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인물, 배경 같은 것은 없다. 무언가를 향해가지도 무언가를 축으로 쌓아가지도 않는 생각의 나래는 나의 칼럼 또한 무언가를 향해가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마치 이 작품을 내가 무어라 뼈대를 이룬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로써 이 작품을 모욕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작가가 얼마나 스스로도 질리게끔 뭔가를 하거나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고, 그에게 있어 답은 그의 삶 속에 결국 남은 시간을 글로 허비하기로 귀결시켰던 것이 아닐까. 옥수수 알갱이를 세면서 시간을 가게 하는 방법보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문득 내가 죽기 전에 이 작품 하나를 완벽하게 깨우치기만 해도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이 멋있는 것은 어떠한 무의식의 문장 속에서 의식을 첨가하면 그것이야말로 독자마다의 개인적인 교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121페이지에서 이러한 문장이 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원숭이였지만 장난을 좋아하는 데 코코넛만 있으면 언제까지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장난을 할 수 있었다”,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코코넛이 지켜줄 것이었다”. 이러한 무의식에다가 독자인 글을 쓰는 나로써 의식을 첨가해보자. 이러한 문장은 즉 작가에게 있어서 연필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은 그의 작품이 지켜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지만 작가는 죽어서 책을 남긴다. 그렇다면 정영문 작가는 죽어서 상상을 위한 상상을 남길 것이다. 이 말은 소설의 마지막 파트인 ‘뜬구름’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직 구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결국에는 다른 얘기를 하게 되었고, 하지만 또 구름이야기가 맞는 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기의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다는 것. 솔직하다 못해 그 솔직함이 의무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다시 이 감상문의 초반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내가 읽은 것이 소설인지 수필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삶이 소설 같은 것이라면 소설 같은 수필일테니까. 이 소설 안에 담긴 내용이 진실인가 허구인가 생각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민이면서도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소설이라고 단정을 짓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별로인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영문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는 허구성이면서 이는 곧 정영문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서은송

2016년부터 현재, 서울시 청소년 명예시장

2016/서울시 청소년의회 의장, 인권위원회 위원

뭇별마냥 흩날리는 문자의 굶주림 속에서 말 한 방울 쉽게 흘려내지 못해, 오늘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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