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가뭄과 태풍, 폭염도 아랑곳 않고 홍자색 꽃 가득 피워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Amitostigma gracile (Blume) Schltr.

[오피니언타임스=김인철] 산과 들에서 피는 그 어느 꽃 한 송이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겠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저절로 피는 자생난초를 보면 더더욱 그 힘찬 생명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산과 계곡의 바위나 풀숲, 바닷가의 아슬아슬한 절벽, 이런 척박한 환경도 모자라 장대같이 키 큰 고목의 줄기나 가지 겉에 겨우겨우 뿌리를 내리고, 희거나 붉거나 노란, 때론 연초록이거나 검은,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진기하고도 청초한 꽃들을 피워내는 걸 보면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오곤 합니다. 미끈하게 구워진 도자기에 담긴 원예종 난초만을 봐온 도시인들에겐 더욱더 그러합니다.

자생난초란 화단이나 화분 등에서 일부러 심거나 가꾼 게 아니라 자연에서 절로 자라난 난초를 말하는데, 우리 국토가 자생난초의 천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전국 각지의 숲속 땅은 물론 바위나 나무 등지에 뿌리를 내리고 계절에 따라 꽃을 피우는 자생난초가 무려 100종이 넘습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핀다고 해서 지생난(地生蘭)이라 구분하는 춘란과 한란, 은대난초, 은난초, 새우난초, 금난초 등이 주를 이루지만, 풍란과 석곡, 지네발란 등처럼 나무나 돌에 착근해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가는 착생난(着生蘭)도 적지 않습니다.

지난 7월 4일 서울 인근 서해의 작은 섬 바닷가 바위 위 절묘한 곳에 병아리난초가 활짝 피어 있다. 태풍 ‘뿌라삐룬’이 지나간 직후여서 평상시 황토색이던 바닷물은 물론 하늘까지 파랗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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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여름을 앞두고 가뭄이 극에 달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태풍이 불고, 장맛비가 며칠씩 쏟아지고, 또는 때 이른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등 기후 변화가 요동을 치는 6~7월 우리 땅에서 자라는 100종이 넘는 자생난초 중 하나가, 변덕스러운 세상사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초연한 모습으로 깜찍하고 앙증맞은 꽃을 피웁니다.

치마난초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귀하디귀한 광릉요강꽃이나 복주머니란처럼 아주 제한된 자생지에서 드물게 피는 것이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꽃을 피웁니다. 높은 산 깊은 숲에 몰래 숨어 피는가 하면, 바닷가 솔숲 모래밭은 물론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위 겉에서 나 보란 듯이 고개를 들고 있기도 하고, 심지어 많은 이들이 손쉽게 오르는 관악산이나 북한산 등 수도 서울의 친숙한 산의 바위에도 손바닥만 한 이끼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웁니다.

태풍이 불고 장맛비가 내리는 악천후가 지나간 뒤인 지난 7월 7일 경남 김해의 불모산 중턱에 수백 촉의 병아리난초가 피어나 야생난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웅변했다. 한두 촉에서, 많으면 수십 촉이 피는 게 고작인 다른 자생지와 달리 수백 촉이 군락을 이뤄 장관을 연출했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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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원예종 난초처럼 바람 불면 날아갈세라, 비 오면 뿌리가 썩을세라, 가뭄 들면 말라 죽을세라 애지중지하지 않아도 해마다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이, 이번에 소개하는 야생난초가 가진 최고의 특징입니다. 또한 다른 이름난 자생난초에 비해 너무 귀하지 않고 너무 먼 데 서식하지 않아서 일부러 멀리 찾아가지 않더라도 조금만 관심과 애정을 쏟으면 만날 수 있다는 접근의 용이성이 또 다른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 색이 온통 흰색인 병아리난초. 대개는 옅은 홍자색이지만, 드물게 흰 꽃을 피우는 개체가 있다. 단 한 촉이지만, 백마 탄 왕자의 기품이 난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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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전국에 분포하며 반 그늘진 계곡의 바위나 자갈밭 등에 생육한다.’고 국가생물종정보지식시스템에 소개된 병아리난초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너비 1~2cm, 깊이 3~8cm의 타원형 잎이 한 장 땅바닥에 깔리고, 그 위로 8~20cm 정도 높이로 꽃대가 올라와 작게는 서너 개에서 많게는 20개가 넘는 꽃송이가 한쪽으로 치우쳐 층층이 달리는데, 꽃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며 핍니다.

이파리 하나에 8~20cm가량의 꽃대를 올려, 많게는 20개가 넘는 꽃을 촘촘히 달고 선 병아리난초. 척박한 바위 위 이끼에 뿌리를 내리고 자생한다.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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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cm 크기의 자잘한 꽃을 촘촘히 달고 바위 위에 오뚝 선 모습을 보면, 특히 수십 수백 송이가 무리를 지어 피어 있는 광경을 보면 누구나 ‘병아리난초’란 이름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학자들이 새로 작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이름인 ‘ヒナ(병아리)ラン(蘭)’을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꽃 색은 옅은 홍자색인데, 간혹 흰색으로 피는 개체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같은 병아리난초속 식물로 구름병아리난초와,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점박이구름병아리난초도 고산지대에 희귀하게 자생하고 있습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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