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영인의 정화수(井華水)]

[오피니언타임스=도영인] 시간이라는 바다 속에서 작게라도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한, 그 사람에게 주어진 삶은 막막한 바다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것처럼 가치를 갖게 된다. 어떤 형태로든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면, 사람은 자기 삶에 대한 목적의식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견디기 힘든 시간을 가장 보람 있게 쓴 사람의 예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포로로 잡힌 미군의 이야기가 있다. 창문도 없이 깜깜한 포로수용소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열악한 상태에 처했던 이 미군에게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무의미하게 남아도는 시간이었다. 그가 포로상태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삶의 목적을 상실했다는 자각이었다. 멈춰 버린 듯 무의미한 시간이라는 어둠 속에서 이 군인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목적이라도 스스로 찾아내지 않으면 곧 미칠 것 같다는 불안감을 경험했다.

Ⓒ픽사베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이 미군포로는 그가 살던 지역에서 존경받는 매우 유능한 건축가였고 매일 꽉 찬 바쁜 일정을 유용하게 보내는 것에 익숙하였던 사람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으로 그가 생각해낸 것은 자유인으로서 분주한 삶을 살았던 시절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비좁은 감방에서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운동을 하고 할 일없이 방치된 두뇌를 쓸모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마음속에서 건물을 디자인하기로 했다. 그는 매일 빼놓지 않고 구석구석 모든 신체부위를 움직여서 운동했고, 몸을 쓰지 않을 때는 명상하는 것처럼 꼼작도 하지 않고 앉은 상태에서 나중에 짓고 싶은 건물을 상상하면서 건축에 필요한 측량수치, 건축자재와 그 분량 등을 치밀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남아도는 시간을 알뜰하게 쓰는 동안에 여러 해가 지났고 무료하고 무의미할 수 있었던 시간을 삶의 목적이 살아있는 잘 통제된 삶으로 만들었다. 수년간 억류생활을 견디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거의 다 망가져버린 다른 포로들과는 달리 종전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후에 이 사람은 포로수용소에서 열심히 마음속으로 설계했던 건물들을 그대로 정확하게 건축해내고 다시 성공적인 삶을 되찾았다고 한다.

일찍이 이슬람세계가 배출한 저명한 시인 루미(Rumi)는 “형제여, 그대는 스스로 하는 생각일 뿐이다. 생각 말고는 근육과 뼈에 지나지 않는다네”라고 읊었다. 사람의 가치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한대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만약 중독행위나 사고로 인한 의식불명상태 등으로 의식세계가 무너지면 설사 튼튼한 몸을 가졌다 해도 그 존재시간은 무의미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은 시간에 쫒기는 좀비라도 된 듯이 숨 가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람들이 정상으로 보이게 된지 벌써 오래이다.

너도 나도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젊은 층은 말할 것도 없고 “백수가 과로사로 죽는다”는 과장된 표현도 그냥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시간을 현명하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현실을 반영하듯이 시간경영에 관한 책이나 영상물도 쉽게 접할 수 있다. TED강의에 나온 한 강사는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특정한 일에 시간을 쓰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TV 시청 시에 의식적으로 광고를 안보는 등 찔끔찔끔 낭비되는 시간을 아끼는 방법도 다양하게 많겠으나 이 시간경영전문가에 의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언제나 얼마든지 있다!

그녀의 TED강의에 나오는 핵심내용은 시간을 쓰지 않으면 안 돼는 위급상황에서는 누구나 아무리 바빠도 그 상황을 해결할 시간을 내기 마련이므로, 위급상황이 아닌 평소에도 정말로 우리 삶에서 중차대한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고 가장 가치 있는 일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고 살면 그에 필요한 시간은 저절로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강사가 하는 말이 무척 합당하다고 느껴져서 필자도 현재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일은 결국 내 시간을 쓰고 만 다른 일들보다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때문이 아닌가라는 자문을 하게 된 셈이다.

필자의 경우에도 정말로 할 일은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시간이 없다고 느낄 때가 무척 많은 편이다. 여러분도 필자처럼 한 순간 한 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이 무엇이든지 열심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써 본 경험이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매일 출근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일정을 조절하며 사는 경우에는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를 따져보아야 하는 갈등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거의 자동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우선순위는 먹고 사는 일에 시간을 쓰는 일일 것이다. 시간을 가치 있게 쓰기 위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다보면 일반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맨 먼저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참 일할 나이에 가족관계, 건강 챙기기, 혹은 신앙생활을 최우선순위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많건 적건 일정한 금액의 생활비용이 보장되어 있는 노인인구를 제외하고 생계비를 스스로 벌어야만 하는 경제활동연령층에 속하는 일반인은 먼저 직업과 가족이 우선순위가 되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은 소홀하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일하게 되고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삶의 전체 모습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도 살기 위해서, 또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서 일하는데 시간을 쓴다.

현재 우리나라가 가진 경제제도와 노동시장구조 내에서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할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보다 상대적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앞에서 얘기한 전쟁포로처럼 시간이 남아도는 상황이 더 나은가, 아니면 먹고 사는 일에만 시간을 전부 다 바쳐야 하는 분주한 삶이 훨씬 더 나은가? 혹시 개인이 각자 처한 특수 환경과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변함없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삶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나 부처님 섬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으면 그 중요한 믿음도 유지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에 건강이 제일 먼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필자는 누구나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각자 통제할 수 있는 내면의식상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감방에 갇힌 상태에서 시간이 넘쳐나는 상황이든지 직장과 가족생활이라는 정해진 삶의 틀 속에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처지에 있든지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의 質(질)은 그 사람의 의식 상태에 의해 정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 상태는 결국 물질현상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므로 돈이 어디에 쓰여 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화려한 옷, 값비싼 외제 자동차, 자녀의 과외학습비 등에 돈이 쓰였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시간을 사용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없이도 (건강한 몸일 경우에는 더욱 편안한 상태로) 할 수 있는 명상이나 기도하는 일이 제일 중요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선택을 하였다면 그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해도 주어진 시간을 자유롭게 쓴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삶이 될 것이다.

요즘 들어서 필자는 그때그때 펼쳐지는 상황을 가능한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조금씩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정기적으로 시간을 쓰기로 우선순위를 정한 일들 이외에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계속 쌓이게 된다. 미리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발생할 때 이미 하기로 정해진 일들을 뒤로하고 예정에 없던 엉뚱한 일을 여유롭게 하기도 한다. 시간이 정말 없다는 생각조차도 뒤로 미루기로 한 필자는 (남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거나 너무 무책임한 일만 아니라면) 자유로운 시간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무한한 시간의 흐름을 즐기기로 했다. 삶이라는 주어진 존재상황을 구태여 감옥에 갇힌 비자발적인 억류상태로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한한 의식의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 같은 상태를 즐기지 못하고 먹고 사는 일에 시간을 모두 다 바쳐야만 한다고 믿는 분들에게 은퇴자로서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정말 없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하고 산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좀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우선순위를 꼼꼼하게 따져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TED 강사가 설명한대로 정말로 중요하다고 자각하는 일에는 언제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삶이 부여한 인간조건에서 가능한 한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고 주어진 매순간들을 즐기기 위해서 각자의 의식세계를 나름대로 환하게 밝힐 수 있다면 우리는 다 함께 시간의 바다를 여유롭게 헤엄치는 개인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다 함께 그런 만족한 의식 상태에서 만들어내는 행복한 사회로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각자 자신감 있게 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적어도 너도 나도 똑같이 시간에 쫒기며 정신없이 몰려다니는 극심한 경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영인

한 영성코칭연구소장
영성과 보건복지학회 고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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