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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티 약속[최미주의 혜윰 행]
최미주 | 승인 2018.07.27 09:39

[논객닷컴=최미주] 기말고사 시험기간, 한숨 돌리려던 찰나에 재형 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제티 캔 여러 개를 꺼냅니다. 항상 ‘이번 시험 망할 것 같아요. 인문계 못 갈 것 같아요’를 입에 달고 살던 중3 재형이와 앞으로 부정적인 말을 할 때마다 제티를 받기로 약속했지요.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지 어려운 내용을 배울 때마다 재형이는 ‘못하겠어요. 어려워요. 공부해도 성적 안 오를 것 같아요’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제티 하나, 제티 둘’ 개수를 세곤 했지요.

어느덧 재형이가 교탁에 담 쌓듯 캔을 쌓고 있습니다. 당장 시험이 내일인 녀석이 캔을 하나, 둘 쌓으며 캔 높이만큼 선생님은 힘을 내야 한다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는데 가슴이 찡했습니다. 학생들 앞에서 하루 종일 수업해서 힘들다고 어지간히 생색을 냈나 봅니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고마운 마음이 한꺼번에 몰려와 끝까지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최미주

재형이는 3월에 새로 학원에 온 학생 중 제일 다가가기 힘들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눈을 잘 마주치려 하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괜스레 눈치가 보였죠. 화가 나면 벽을 툭툭 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무뚝뚝한 재형이와 친해지기 시작한 건 중간고사 이후부터였습니다. 국어 시험을 본 후 몸에 힘이 쭉 빠져서는 OMR마킹을 잘못했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더군요. 괜찮다고, 열심히 했으면 됐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데, 학생이 하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시험 망친 것도 망친거지만 안 하려는 놈 붙잡고 시간 쓰신 선생님한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요”

학생도 사람인지라 울음이 나는 이유는 복합적이겠지요. 대게 울음은 한 가지 사건 때문에 흘러내리기 보다는 부정적인 무엇인가가 쌓이고 쌓여서 참을 수 없을 때 터지기 마련이니까요. 재형이가 겉보기에는 무뚝뚝해 보여도 참 사려깊은 아이라는 사실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중간고사 이후부터 OMR마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재형이의 부정적 생각이 더 자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이른바 ‘제티 약속’을 맺게 되었죠. 살다보면 나쁜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겠지만 학생들이 항상 긍정적이고 밝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제티 탑을 쌓은 다음 날, 어제까지만 해도 남에게 힘을 줬던 재형이가 또 다시 힘이 빠진 채로 기말고사 시험지를 손에 들고 국어 교실을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마킹도 잘하고, 서술형도 배운 대로 다 적었지만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해서 너무 억울하다고 하더군요. 이건 주말까지 나오신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꼬깃꼬깃 접은 시험지를 펴서 재형이가 45분 동안 고민했던 흔적을 지켜보는데 웃음이 나더군요.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맞혔고, 전날 외웠던 서술형 문제마저 완벽하게 적고 왔기 때문입니다. 적용 문제야 이제부터 연습하면 되니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0점이나 오르기가 어디 쉽냐며, 이렇게 잘했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고 어깨를 토닥토닥 거렸더니 차라리 혼을 내시지 선생님은 항상 저를 울린다며 눈물 훔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습니다.

1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태풍이 지나가고 이제는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제티 사건 이후 재형이는 ‘이걸 어떻게... 아! 할 수 있죠!’하며 말투를 고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재형이는 국어 책을 가져와 보충 수업을 해달라고 하거나, 수업이 마칠 때까지 저를 기다리다가 뒷정리를 도와주곤 합니다. 빗자루로 교실을 쓸며 수업 중 잘못했던 일을 고백하고, 뉘우칠 때도 있지요. 반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 몸과 마음이 부쩍 성장한 녀석을 보는 벅찬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재형이와 비슷한 학생들에게 그 점수가 점수냐고. 그런 점수 받을 거면 공부를 왜하냐고 말합니다. 덩달아 국어 성적 90점 넘은 학생이 몇 명이나 되냐고 질문을 합니다. 무뚝뚝하던 학생이 웃음 짓고, 선생님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책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성장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일까요?

폭염이 너무 심해서 여름 방학을 연장할 수도 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강한 햇볕이 학생들을 힘들게 한다고요. 하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 ‘D-100’을 코앞에 둔 고3 수험생들은 햇볕이 가장 강한 오후 2시부터 학원에 옵니다. 중3 재형이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학원에 와 대답을 열심히 하구요. 점수가 좋든 나쁘든 더운 여름에 고생하는 학생들을 보면 예쁘기도 하면서, 무엇을 위해서 여름 방학까지 고생을 이토록 하는지 마음 한 편이 무겁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무더운 여름 이것저것 참아가며 책을 마주하고 있는 학생들과 재형이와 했던 제티 약속을 맺고 싶습니다. 부정 금지! 긍정적으로! 수험생 여러분, 다 잘 될 거예요. 

최미주

일에 밀려난 너의 감정, 부끄러움에 가린 나의 감정, 평가가 두려운 우리들의 감정.

우리들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감정동산’을 꿈꾸며.

100가지 감정, 100가지 생각을 100가지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쪼꼬미 국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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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주  cmj78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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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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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용현 2018-07-31 11:24:05

    저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면서 한 가지 신조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시험 개 무시"였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못 본다구요? 아니던데요?
    제 별명이 <시험 동방불패>였습니다. 대학입시, 고시 등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져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는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원효대사 말씀을 빌면, "시험은 마음에 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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