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2]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그 짐승들은 대체로 크기가 비슷했다. 모두 엷은 흰 바탕에 노란빛이 감도는 짧은 털이 나 있었다. 머리는 말처럼 생겼고 눈은 양과 같았다. 꼬리는 소같이 생겼다. 걸을 때는 목을 움찔거리며 머리를 꼿꼿하게 치켜드는 것이 마치 하늘을 나는 백로처럼 보였다. 무릎에서는 마디가 두 개 튀어나와 있고 발굽은 두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걸음은 학 같고, 울음소리는 거위 같았다.”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낙타의 생김새를 이같이 묘사하고 있었다. 말과 양, 소, 백로, 학, 거위까지 동원해서 어렵게 기록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낙타가 무척 신기했을 것이다. 조선 사람에게 낙타라는 짐승은 생소했다. ‘지식인’ 박지원조차 놀랄 정도로 희한하게 보였다.

그러나 고구려 때는 그렇지 않았다.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전리품’을 챙겼다. 호구 2만8200호, 수레 1080동, 소 3300두, 말 2900필 등이었다. 그 전리품 목록에는 ‘낙타 60마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픽사베이

고구려는 낙타를 일본에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수나라의 113만 침략군을 물리친 고구려가 포로 2명과 노획한 무기, 그리고 ‘낙타 한 마리’를 하사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기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왜나라’에 낙타를 보내고 있었다.

왜나라는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618년(推古 26년) 고구려가 토산물을 바쳤다. 북, 피리, 노, 포석 등 10여 종의 토산물과 낙타를 바쳤다(八月高麗遣使貢方物 鼓·吹·弩·抛石之類十物 幷土物駱駝一匹).”

고구려가 ‘바친’ 선물 가운데 ‘노(弩)’는 여러 개의 화살을 잇달아 쏘는 장치, ‘포석(抛石)’은 전쟁에 쓰는 투석용 돌이다.

짐승을 조공으로 바칠 때는 암수 한 쌍을 보내는 게 상식이다. 한 쌍을 보내야 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낙타, 흰사슴, 꿩, 공작, 앵무, 물소, 산닭, 당나귀 등을 한 마리씩 받았다고 기록, 조공으로 받은 짐승이 번식도 못하고 홀로 죽어가도록 하고 있다.… 한 마리씩만 보냈다면, 세상에는 이런 짐승과 새도 있으니 구경이나 해보라고 선물로 준 것밖에 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왜나라는 낙타 한 마리(駱駝一匹)를 받고도 고구려가 ‘자기들에게 바친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일본(倭)은 열도에 없었다, 鄭龍石 지음>

낙타는 사막지방에 흔한 짐승이다. 그런 짐승이 전리품 목록에 들어갔다면 고구려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현재의 몽골공화국 동부지역인 ‘할흐곰솜’에서 고구려 석성 유적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고구려가 이곳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몽골 동남부 다르강가 지역의 가로 세로 200m, 높이 2m의 토성을 비롯한 토성 3개와, 보이르 호수 주변에 있는 가로 세로 80m 가량의 토성이 ‘고구려성’으로 추정된다는 한몽 공동학술 조사단의 보고도 1990년대에 있었다.

몇 해 전에는 고구려가 7세기에 중앙아시아 국가와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를 실물 수준으로 복원한 모사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으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새 깃을 꽂은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있었다. 고구려 사신은 아마도 낙타를 타고 중앙아시아를 여행했을 것이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5세기 무렵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 2000리, 남북 1000리였다. 이 영토가 얼마 후 동서 3100리, 남북 2000리로 늘어났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동서 6000리나 되었다고 했다. 오늘날, 비행기를 타고도 여러 시간이나 날아가야 하는 거리다.

장수왕 때 고구려는 ‘영평(營平) 2주(州)’를 지배했다. 영주는 오늘날의 대릉하 유역 조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평주는 만리장성을 넘어 난하 하류, 북경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 넓은 땅이 모두 고구려 영토였다.

고려시대에도 낙타는 생소하지 않았다. 태조 왕건이 낙타를 굶겨 죽인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거란 태종이 화친의 뜻으로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냈는데, 낙타는 개경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죽이고 사신은 섬으로 귀양 보낸 것이다.

낙타를 전리품으로 빼앗아오기도 했다. 강감찬 장군이 소손녕의 거란 군사 물리치고 빼앗은 전리품 목록에 사람, 말, 갑옷, 투구, 무구 등과 함께 낙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임금이 기쁜 나머지 영파역까지 마중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낙타의 먹이에 관한 규정도 있었다. 봄, 여름에는 ‘피 5승, 두 5승, 염 5홉’을 먹였고, 가을, 겨울에는 ‘피 2승, 두 9승, 염 3홉’을 먹이로 주었다.

고려의 영토는 ‘두만강 북쪽 700리’에 뻗치기도 했다. 원나라가 제주도에 말을 방목할 때 낙타도 함께 사육했다고 한다.

이랬던 낙타가 조선시대에는 ‘신기한 짐승’이 되고 있었다. 왜나라에 하사했던 낙타를 조선 때에는 거꾸로 하사받기도 했다. 금나라가 인조 임금에게 낙타를 선물로 보낸 것이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낙타는 더욱 신기한 짐승이 되었다. 숙종 임금 때는 청나라 사신이 버리고 간 낙타를 한양으로 끌고 왔다. 구경꾼이 가득 몰려들었다. 임금까지 몰래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낙타는 국경지대에서 대륙과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나 어쩌다 마주치는 짐승이 되었다.

지금은 또 어떤가. 낙타는 동물원에나 가야 구경할 수 있는 짐승이다. 낙타처럼, 우리는 갈수록 오그라든 것이다. 광활했던 영토는 낙타만큼이나 아득한 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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