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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탉’[김부복의 고구려POWER3]
김부복 | 승인 2018.10.19 11:34

[논객닷컴=김부복]  “수탉을 잡자.”

신라에서 이런 ‘암구호(暗口號)’가 은밀하게 돌았다. 그리고 ‘수탉 사냥’이 시작되었다. 신라의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를 공격한 것이다. ‘수탉’은 고구려 군사를 이르는 말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부터 장수대왕에 이르기까지 무려 60여 년 동안 신라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오늘날 미국이 우리나라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는 것과 ‘닮은꼴’이었다. 고구려는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신라는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반미 감정’처럼, ‘반고구려 감정’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가 마침내 고구려에게 반기를 들게 된 계기는 “고구려가 곧 신라를 멸망시킬지 모른다”는 어떤 고구려 주둔 군사의 발언 때문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의 ‘기습작전’이었다.

그 바람에 두 나라 관계는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노발대발한 장수대왕은 보복으로 대군을 보내 신라의 ‘실직주성’을 점령했다. 수도인 ‘금성’ 바로 북쪽에 있는 ‘미질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픽사베이

그런데, 신라는 왜 “수탉을 잡자”고 했을까. 수탉이 고구려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닭을 좋아했다. 무용총(舞踊塚) 벽화에 있는 ‘사신도’의 한 자리인 주작 자리에 닭을 그려 넣었을 정도다. 그래서 ‘수탉 사냥’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쓰고 있는 모자 때문이기도 했다. 고구려 모자는 독특했다. 삼각형으로 된 마름모꼴이었다. 모자 양쪽에는 새의 깃털을 꽂아서 멋을 부렸다. ‘절풍모(折風帽)’였다. 그 절풍모의 모양이 마치 닭의 벼슬처럼 생겼다고 해서 ‘수탉 사냥’이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절풍모를 자랑스럽게 쓰고 다녔다. 절풍모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물론이고 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서역 관문인 ‘돈황 석굴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고구려 사람이 새의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그림이다. 고구려의 영향력은 그 머나먼 곳에도 뻗치고 있었다.

절풍모는 ‘적국’인 당나라에서도 유행했다. 절풍모뿐 아니라 고구려 문화 전체가 당나라를 장악했다. 당나라 임금이 거주하는 궁전에서도 고구려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그 ‘고구려 한류’는 고구려가 망한 이후에도 여전했다. 천재 시인 이백(李白)은 절풍모에 관한 글을 이렇게 읊기도 했다.

“깃털 모양의 금으로 장식된 절풍모를 쓰고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추고 있다. 새처럼 나래를 펼치고 해동에서 날아왔네.…”

고구려 문화는 오늘날 ‘한류’의 원조였던 셈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한류를 넘어서고 있었다. ‘고구려 것’을 당당하게 과시했기 때문이다.

서양식 곡에 외국어 가사가 섞여 있는 요즘 한류와는 좀 달랐다. 세계적 열풍인 ‘방탄소년단’은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국제화’ 덕분일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북방민족 또는 기마민족을 자기들 문화에 동화(同化)시켰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 사람들이 되레 동화된 문화도 적지 않다.

송나라 학자 심괄(沈括·1031~1095)은 저서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그 구체적 증거를 들고 있다.
“북조(北朝) 이래로 모두 호복(胡服)을 입었다. 당나라 정관(貞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정관’은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받드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연호를 이르는 말이다. 그 당 태종도 ‘오랑캐’인 북방민족의 문화를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도 기마민족처럼 말을 타고 달리기 위해서는 ‘목이 긴 신발’, ‘장요화’를 신을 수밖에 없다. 가시덤불을 통과하다가 종아리가 자칫 상처투성이로 되는 것을 피하려면 그래야 했다.

고구려의 신발이 그 장요화였다. 쌍영총(雙楹塚) 벽화에는 주인공 ‘내외’가 신발을 벗어놓고 좌탑(座榻) 위에 앉아 있다. 그 벗어놓은 신발이 반장화처럼 목이 긴 장요화다. ‘내외’라고 했으니, 고구려 때는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도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랬던 ‘한류의 과거사’가 뒤집히고 있다.

왜란 때 ‘구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주둔했던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는 망건을 언제나 ‘눈썹 위 3치가량 올라간 위치’에 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양호의 이마에 종기가 있어서 망건을 눌러서 쓰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상 마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망건 속에 거두어 넣기 껄끄러워서 그럴 것이라는 등의 추측을 하면서도 양호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망건을 높이 쓰는 ‘양호 스타일’이 유행이었다.

양호와 ‘임무교대’를 하고 온 명나라 장군 만세덕(萬歲德)은 한쪽 눈을 찡그리는 습관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망건을 높이 걸쳐 쓴 사람에게 “자네도 양호 흉내를 내는가” 꼬집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너는 만세덕 흉내를 내고 있지 않은가” 받아치고 있었다. 꼬집은 사람은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 임금 때 선비 고상안(高尙顔∙1553∼1623)의 ‘효빈잡기(效嚬雜記)’에 나오는 얘기다.

김부복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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