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시기별 왕릉에서 나타나는 석인상의 변화

[오피니언타임스=김희태] 이전의 연재에서 소개한 것(왕릉에는 어떤 ‘석수(石獸)’가 세워졌을까?)처럼 왕릉에는 ‘석수’와 함께 ‘석인상’ 등의 석물이 세워지는데, 시기별로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석물이라고 하면 양이나 호랑이, 말 등의 동물을 새긴 석수와 문관 혹은 무관 등의 관리를 형상화한 ‘석인상’인데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 ‘장명등’을 포함한 ‘망주석’ 등의 석물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오늘은 왕릉의 석인상을 통해 시기별의 변화와 특징을 소개하고자 한다.

■ 최초로 석물이 등장한 신라왕릉 : 관검석인상과 호인상

왕릉에 처음으로 석인상이 세워진 사례는 신라왕릉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성덕왕릉이다. 성덕왕릉에는 ‘관검석인상(冠劍石人像)’ 2기가 세워져 있다. 1기의 경우 상반신 일부만 간신히 남아 있다. 본래 관검석인상은 중국의 황제릉에서 확인되는 석인상으로, 당나라 건릉(=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관검석인상과 성덕왕릉의 관검석인상을 비교해보면 일부 복식과 검이 드러나는 차이만 있을 뿐 매우 유사하다. 즉 성덕왕릉의 석인상이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덕왕릉의 관검석인상 ⓒ김희태
원성왕릉의 관검석인상, 조각 수법과 형태로 봤을 때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김희태
흥덕왕릉의 관검석인상 ⓒ김희태

한편 관검석인상은 경주 지역의 36곳의 신라왕릉 가운데 성덕왕릉과 원성왕릉, 흥덕왕릉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또한 조각 수법이나 석인상의 형태를 봤을 때 원성왕릉에 세워진 관검석인상이 가장 완성도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성덕왕릉에는 없지만, 원성왕릉을 비롯해 헌덕왕릉과 흥덕왕릉 등에서 ‘호인상(胡人像)’이 확인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호인상의 외형이 마치 서역인을 닮은 외모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실크로드와 관련한 설명을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다. 반면 종전까지 호인상과 관련해 서역인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했지만, 최근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조선왕릉 석물조각사>를 통해 호인상이 서역인이 아닌 금강역사로 보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원성왕릉의 호인상, 서역인으로 보는 견해와 최근 금강역사로 보는 견해 등 호인상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있다. ⓒ김희태
흥덕왕릉의 호인상 전경 ⓒ김희태
경주고등학교에 있는 호인상의 일부, 헌덕왕릉의 것으로 전해진다. ⓒ김희태

한편 성덕왕릉에는 없는 호인상이 원성왕릉부터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신라왕릉을 연구했던 고 이근직은 <신라왕릉연구>를 통해 “당나라에서 호인용이 등장한 것이 8세기 후반”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원성왕릉 시기에 호인상이 세워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신라왕릉에 등장하는 석인상과 석물의 배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왕릉과 차별이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고려왕릉의 석인상 : 강화도의 고려왕릉, 고양 공양왕릉의 석인상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왕릉의 상당수는 북한 땅인 개성(=개경)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에 제약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국내에서 고려왕릉을 볼 수 있는 장소는 강화도와 고양, 삼척 등 일부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직접 볼 수 있는 고려왕릉 중 석인상이 세워진 사례는 ‘강화 석릉(江華 碩陵)’과 ‘강화 홍릉(江華洪陵)’, ‘강화 곤릉(江華 坤陵)’, ‘강화 가릉(江華 嘉陵)’ 및 고양에 위치한 ‘공양왕릉(恭讓王陵)’ 등이 있다. 고려왕릉의 석인상은 크게 관모를 쓰고, 홀을 들고 있는 도상으로, 강화도와 고양의 고려왕릉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강화 홍릉의 석인상,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좌우 2쌍, 총 4기가 세워져 있다. ⓒ김희태
강화 석릉의 석인상, 발굴조사를 통해 하부구조가 일치하지 않아 석릉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희태

우선 강화도의 고려왕릉 가운데 대표격이라면 단연 ‘강화 홍릉’을 들 수 있다. 홍릉은 고려 고종의 능으로, 고종 시기에 강화 천도가 이루어졌기에 강화도의 고려왕릉 가운데 상징성이 있는 능이라 할 수 있다. 강화 홍릉의 경우 좌우 2쌍, 총 4기의 석인상이 확인되고 있는데, 강화도의 고려왕릉 가운데 유일하다. 반면 석릉이나 가릉 등의 경우 문인석이 1쌍 세워져 있고, 곤릉의 경우 발굴조사를 통해 문인석의 머리 부분이 1쌍 출토가 되었다. 이 가운데 석릉의 경우 문인석의 하부구조가 맞지 않다는 점에서 석릉과 문인석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가 맞을 경우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유일하게 석릉만 문인석이 없다는 말이 된다.

강화 가릉의 석인상, 관모와 홀을 들고 있는 공통된 도안을 보이고 있다. ⓒ김희태
고양 공양왕릉의 석인상, 좌우 2쌍, 총 4기가 세워져 있다. ⓒ김희태

 

반면 고양에 있는 공양왕릉은 크기는 좀 더 작아졌지만, 석물의 조각 수법이나 형태는 사실적으로 변모한 것을 볼 수 있다. 공양왕릉의 경우 문인석이 좌우 2쌍, 총 4기가 배치된 모습이며, 같은 문인석이지만 크기와 형태가 다르다는 점 역시 강화도의 고려왕릉과는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고려왕릉은 조선왕릉의 원형으로 소개된 바 있는데, 특히 공민왕의 ‘현릉(玄陵)’은 조선왕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시기별로 외형의 차이를 보이는 조선왕릉 : 석인상에 남겨진 시대의 흔적

조선왕릉의 경우 총 42기가 조성이 되었는데, 이 가운데 북한에 있는 ‘제릉(齊陵,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와 ‘후릉(厚陵,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를 제외하면 40기가 국내에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보통 왕이나 왕비, 대비 등이 승하하게 되면 그때부터 왕릉을 조성하기 위한 임시관청인 ‘국장도감(國葬都監)’이 설치되고, 왕릉의 조성하기 위한 ‘산릉도감(山陵都監)’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보통 <국조오례의>를 바탕으로 왕릉이 조성되기에 전반적인 왕릉의 형태는 유사성을 드러낸다. 다만 해당 시기별로 특징을 보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석물이다. 이러한 석물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석인상으로, 조선왕릉의 경우 석인상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구분, 시기별로 비교해보는 것이 좋다.

건원릉의 문인석 전경 ⓒ김희태
희릉의 문인석, 조선왕릉의 문인석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김희태

 

우선 조선왕릉의 문인석은 조각 수법과 규모를 통해 구분할 수 있는데, 규모가 가장 큰 사례는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禧陵)’으로 그 크기가 무려 319cm다. 반면 숙종의 ‘명릉(明陵)’은 문인석의 크기가 171cm에 불과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시기별로 석인상은 조각 수법이나 크기가 구분이 되는데, <조선왕릉 석물조각사>에 따르면 문인석의 시기별 크기는 크게 4기로 구분된다. ▲ 1기 태조의 건원릉 문인석(234cm) ▲ 2기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문인석(319cm) ▲ 3기 숙종의 명릉 문인석(171cm) ▲ 4기 정조의 건릉 문인석(218cm)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크기 이외에 조각 수법의 변화 역시 함께 봐야 하는데, 이 경우 조각 수법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령 선조의 ‘목릉(穆陵)’의 문인석은 크기는 크지만 조각 수법은 앞선 시대와 비교해 크게 후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선조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왕릉의 공사에 영향을 미친 사례로, 석물의 조각 수법은 곧 시대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명릉의 문인석, 문인석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다. ⓒ김희태
건릉의 문인석 전경 ⓒ김희태

한편 무인석의 경우 규모가 가장 큰 사례는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泰陵)’으로 크기는 328.6cm다. 반면 가장 규모가 작은 무인석은 숙종의 ‘명릉’으로, 크기가 173.6cm에 불과하다. 보통 숙종의 ‘명릉’을 시작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봉분에서 병풍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또한 석인상의 크기 역시 작아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왕릉의 외형은 사도세자의 현륭원(=융릉)이 들어서며 깨지게 된다. 당시 정조는 옛 수원부의 읍치인 화산으로 사도세자(=장헌제자)의 ‘현륭원(顯隆園)’을 천봉하게 했다. 이때 현륭원을 만들면서, 정조는 숙종 이후 가장 화려한 원소를 조성했는데, 병풍석을 비롯한 와첨상석, 채 피지 못한 연꽃 등이 대표적이다. 왕릉이 아니었지만, 정조의 건릉보다 더 화려하게 조성된 현륭원은 훗날 고종 때 이르러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자연스럽게 ‘융릉(隆陵)’의 능호를 받게 된다.

예릉의 문인석과 무인석, 초기의 석물이 배치된 이유는 구 정릉의 석물을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김희태
광통교에서 볼 수 있는 정릉의 병풍석 흔적,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통교를 함께 봐야한다. ⓒ김희태
융릉(=당시 현륭원)의 능침, 숙종 이후 가장 화려하게 조성된 원소로, 이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철종의 ‘예릉(睿陵)’을 보면 후기에는 나올 수 없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최초 중종의 ‘정릉(靖陵)’이 예릉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정릉이 현 삼성동으로 천봉했지만, 석물을 옮겨가지 못한 채 땅에 파묻게 된다. 그러다 철종의 예릉을 조성하던 중 구 정릉의 석물이 발견 되고, 이를 재활용하면서 조선 전기와 후기의 석물이 혼재하는 특이한 능침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은 조선이 건국된 뒤 처음으로 조성된 조선왕릉으로, 현 ‘정동(貞洞)’에 조성되었다. 하지만 태종이 즉위하면서, 현 정릉은 지금의 성북구로 이장이 되었고, 능에 쓴 석물은 현 광통교 다리 공사에 쓰게 된다. 이 때문에 정릉의 석물을 보려면 오히려 광통교를 가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릉의 능침은 애초에 조성된 석물이라고는 ‘장명등’과 ‘고석’을 제외하면 훗날 현종과 고종 때 추가로 가설된 석물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석인상을 비롯한 석수 등 석물의 변화와 여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이해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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