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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쏟은 물, 그리고 연말 단상[석혜탁의 말머리]
석혜탁 | 승인 2018.11.15 10:08

[논객닷컴=석혜탁]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고도의 친환경의식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고 멋들어지게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 정도로 환경에 대해 고민을 깊이 있게 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반성을 해본다.

ⓒ픽사베이

어찌 됐건 무거운 텀블러를 늘 가방에 넣는 이유는 간단하다. 물을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찬물, 따뜻한 물 가리지 않고 물을 참 좋아한다. 매번 물을 사서 마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무실에서 작은 종이컵에 담긴 양의 물을 홀짝홀짝 마시는 건 어딘가 좀 부족하다. ‘인간 하마’인 내게 종이컵은 그리 달가운 도구가 아니다.

오늘도 집에서 떠온 물을 출근길에 다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물이 마시고 싶어졌다. 냉수, 온수를 적절히 배합해 미지근한 물을 담았다. 환절기에 ‘따뜻한 물’만 한 보약이 없다. 목 넘김도 참 좋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가 조금 길어질 듯해 자리에서 일어나 빈 회의실로 가서 통화를 나누었다. 업무 전화는 늘 그렇듯 재미가 없다. 집중까지 해야 해니 적이 부담스럽다.

자리에 돌아오면서 나의 왼팔이 텀블러의 몸통을 가격했다. 사람을 쳐본 적은 없는데, 사물을 치는 데는 참 특화된 팔뚝이다. 튼튼한 텀블러니 구르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그럴 수 있지, 하는 생각에 텀블러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아뿔싸.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고 전화를 받으러 갔나 보다.

단단하긴 하지만 뚜껑에 빈틈을 보인 이 녀석은 나의 보약인 따뜻한 물을 내 책상에 토해내 버리고 말았다. 이등병 시절의 민첩한 손놀림으로 자판기와 휴대전화를 재빨리 들어 올려 물난리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각종 회의 내용과 과업이 적혀 있는 회사 다이어리도 앞부분만 조금 젖은 채 무사히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물의 양이 꽤 되다 보니 필기구, 클립, 핸드크림 사이사이로 물이 침투했다. 때는 2시 10분. 2시 30분에는 아래층 회의실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짜증을 냈을 것이다. 보통 남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인 게 자명할 때 더 짜증이 나는 법. 화를 낼 대상도 없고, 더구나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기 때문.

두툼한 휴지 뭉치로 키보드 아래를 닦다 보니, 적잖은 먼지가 딸려 나왔다. 정돈에 꽤나 능하고 나름 깔끔한 성격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던 먼지가 이리도 많았다니. 외화내빈의 ‘데스크테리어족’이었다는 사실에 픽 웃음이 나온다.

물기는 차츰 말라갔다. 이왕 닦는 거 마른 휴지로 모니터 뒤와 본체 옆까지 슥슥 닦아냈다. 역시 먼지 더미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물기 어린 휴지에 압송되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사실 텀블러의 물을 엎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을 텀블러에 물을 채우다 보니, 가끔 덜 닫힌 이놈이 한 번씩 고꾸라져서 물을 뿌려댄 적이 왕왕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약간씩 짜증을 냈던 것 같다. 지가 잘못해놓고.

이번엔 이 놈 덕분에 나의 책상을 깨끗이 청소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부분은 열심히 닦는다고 닦았는데, 깊숙한 먼지는 못 보고 살았다는 것도 알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무르는데, 이토록 많은 먼지와 동거하고 있었다니.

벌써 11월이다.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낸 적도, 대단한 일에 감사한 마음을 못 가진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내 주변 친구놈들도 그렇다고 하는 거 보니, 다들 그렇게 부족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나 보다. 연말의 미덕은 앞의 10개월, 11개월의 작은 흑역사를 슬쩍 밀어낼 수 있다는 것.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 갑자기 일어난 작은 일에 화를 내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긍정적인 현상에 주목해보면 어떨까? 내 책상에 흘린 물이 외려 내 책상을 깨끗하게 해 주었듯이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언짢은 일들이 되레 당신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일도 벌어져야 살맛 나지 않겠는가.

연말이다. 따뜻한 물을 마시며 “속이 다 시원하네”라는 말을 읊조릴 수 있는 일들이 독자 여러분에게 많이 일어나기를. 텀블러에 물을 더 채워야겠다. 

 석혜탁

-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저자.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한다. 가끔씩 라디오에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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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탁  sbizconomy@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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