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6]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중국 사람들은 물건(thing)을 ‘뚱시’라고 부른다. 한자로 ‘동서(東西)’다. 글자 그대로 ‘물건’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는 의미다.

세계의 중심이라며 이른바 중화사상을 자부하고 있는 중국 사람들이 왜 물건만큼은 ‘뚱시’라고 부르고 있을까.

‘뚱시’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 옛날 장안성에는 성 동쪽과 서쪽에 시장이 있었다. 주민들이 물건을 사려면 동쪽이나 서쪽 시장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뚱시’다.
② 옛날 큰 상점은 동경인 낙양성과 서경인 장안성에 몰려 있었다. 물건을 사려면 동경이나 서경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뚱시’다.
③ 오행설에 따르면, 동=목, 서=금, 남=화, 북=수다. 목과 금은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지만 화와 수는 담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뚱시’를 사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이유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시장과 상점에 쌓여 있던 물건의 생산지와 유통경로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울의 시장과 상점에 쌓여 있는 상품은 전국 각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이다. 세계 각지에서 생산된 수입품도 있다. 서울에서 생산된 것은 일부 뿐이다.

당시 번성했던 중국의 수도에서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 수 없다. 어디선가 운반되어온 물건이 쌓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은 국토의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강물이 동쪽으로 흐른다. 물건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보내기는 쉬워도, 거꾸로 보내기는 힘들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물건을 운반하기는 까다롭다. 그렇다면 물건은 서에서 동으로 보내는 ‘시뚱(西東)’이 될 수도 있었다.

또, 중국은 이른바 ‘비단길’을 통해 서양의 물건을 많이 받아들였다. 아직까지도 중국 서부 지역에서 서기 1∼3세기 때의 로마시대 화폐가 발견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물건이라는 단어는 서쪽에서 동쪽을 의미하는 ‘시뚱’이 되었음직도 했다. 그런데도 ‘뚱시’다.

중국은 수나라 때 2000리에 이르는 운하를 만들었다. 남쪽의 풍부한 물자를 북쪽으로 옮겨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운하였다. 중국에서는 그 운하 덕분에 ‘식량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잡곡을 주식으로 했던 북쪽 사람들이 남쪽에서 생산된 쌀을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운하는 천 년을 훨씬 넘긴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그동안 ‘엄청’ 많은 물자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언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뚱시’라는 단어는 남쪽에서 북쪽을 의미하는 ‘난뻬이(南北)’로 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뚱시’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는 중국의 동북쪽에 있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만주를 ‘뚱뻬이(東北)’라고 부르고 있다. 고조선의 영토도 만주지방을 포함하고 있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전해주었다면 물건이라는 단어는 ‘뚱뻬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뚱시’다.

물건이 ‘뚱시’가 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운반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바다를 건너는 게 간단할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모든 해상전투가 육지로부터 160km 이내의 거리에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모험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쉽다. 우리민족의 항해술이 빼어났거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 영토가 중국대륙의 동해안 지역까지 뻗쳐 있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중국의 옛 기록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산해경’은 “동해안 구석에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이 조선”이라고 했다. ‘동해안’은 당연히 현재의 ‘중국 연안’이다. ‘고구려는 큰 물가에 나라를 세우고 산다(高麗作國依大水而居)’는 기록도 있다.

‘물건’뿐이었다면 ‘뚱시’의 개념이 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문화까지 중국에 전해주었다. 고구려의 음악은 중국의 황제가 사는 있는 궁전에서 연주되었다. 이태백은 고구려의 음악을 찬양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 문화에 빠져있었다. ‘한류(韓流)의 원조’가 아닐 수 없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는 어땠을까. ‘신당서 발해전’은 발해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생산품을 꼽고 있다.

“태백산(백두산)의 흰 토끼(太白山之兎), 남해의 곤포(昆布) ,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솔빈의 말, 현주의 천(布), 옥주의 풀솜(綿), 용주의 명주(紬), 위성의 철, 노성의 벼(稻), 미타호의 붕어, 환도의 추리(李), 낙유의 배(梨)” 등이라고 했다.

발해의 산업이 융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랬으니, 더욱 ‘뚱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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