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7]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조선 때 선비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조수의 왕래에도 법칙이 있어 아침에는 밀물이라고 하고, 저녁에는 썰물이라고 하니, 조수를 신(信)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기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월민, 제동, 요심의 경계로부터 우리 서남해에 이르기까지 조수가 모두 한가지요, 오직 동해만이 조수가 없는데 중국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므로 아직까지 논의한 사람이 없었다.… 조수의 근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니 우리 서해는 가까운 고로 조수가 미치고, 동해는 먼 고로 조수가 미치지 않는다 하여….”

성현은 밀물과 썰물까지 중국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대주의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던 송시열(宋時烈)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임진의 변에 종묘사직이 이미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세워지게 되고 생민(生民)이 터럭 하나 하나에도 황은(皇恩)의 미치는 바 아님이 없으니….”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서 나라를 구원해준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감사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윤집(尹集)은 인조 임금에게 이렇게 상소했다. 역시 ‘명나라’였다.

“천조(명나라)는 우리나라의 부모입니다(天祖之於我國乃父母也). 청나라는 우리 부모의 원수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명나라의 자식입니다. 청나라가 우리 부모인 명나라를 침략하는데 명나라의 자식 된 우리가 청나라와 화친함은 우리 부모를 잊어버리는 일이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옛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노인 형상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써 서쪽을 향해 얼굴이 열려 중국에 절하고 있는 형상이다. 옛날부터 중국과 친하고 가까이 지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도약하는 모양이라고는 못할망정, 중국에 머리 숙이는 노인이라고 하고 있었다. 이중환은 또 “우리나라는 1000리 되는 물에, 100리 되는 들판이 없는 까닭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한다”고 스스로 낮추기도 했다.

ⓒ픽사베이

그렇다면, 자랑스러운 우리의 세종대왕은 어땠을까. ‘연려실기술’에 뜻밖의 기록이 나온다. 상당히 ‘자존심을 긁는 기록’이다.

세종대왕은 명나라 문황(文皇)의 ‘승하’ 소식을 보고받고 대신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명나라 임금 영락제인 문황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명나라 태조의 유조에 ‘천하의 신민은 상복을 3일간만 입도록 하라’ 하였으나, 이는 주와 현의 관리와 백성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군신간의 의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히 중대하니, 나는 대행황제(大行皇帝)의 상복을 차마 3일간만 입을 수는 없다. 나는 흰옷을 입고 정사를 보다가 27일이 지난 뒤에 복을 벗겠다.”

세종대왕은 그러면서 “모든 신하들은 3일간만 복을 입었다가 벗도록 하라”고 했다. 신하 유정현(柳政鉉) 등이 반대했지만, 세종대왕은 듣지 않았다.

세종대왕은 명나라 임금이 죽었다고 27일 동안이나 애도했던 것이다. 이 기록을 놓고, 세종대왕이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다.

영락제는 순수한 ‘한족’이 아니었다. ‘공비’라는 조선출신 궁녀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영락제에게는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유명한 ‘정화(鄭和)의 원정함대’를 파견했던 임금이다. 정화함대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30여 개국을 원정, 명나라의 국위를 높였다.

영락제는 한족답지 않게 대외 지향적이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그래서 상복을 입은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고구려 때는 ‘거꾸로’였다. 고구려 임금이 승하하자, 중국의 임금이 상복을 입은 것이다.

고구려는 북위(北魏)를 ‘신하의 나라’로 거느리고 있었다. 장수왕 23년(435),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 보내 역대 임금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북위는 내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자기들의 역대 임금 계보와 그 이름 적은 것을 고구려에 바쳤다. 나라의 역사를 바친 것이다. 이는 ‘신하의 나라’가 종주국인 ‘임금의 나라’에 하는 행위였다.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장수왕의 사망이었다. 491년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임금 고조는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 때 입는 베로 만든 옷을 입고 동쪽 교외로 나아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사신과 온갖 물품을 고구려로 보냈다.

519년 문자왕이 사망했을 때도, 전(前) 임금인 세종의 부인이며 숙종의 어머니로 정권을 쥐고 있던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조문사절을 고구려로 보냈다.

508년에는 북위의 세종이 청주(淸州 산동성)에 고구려 시조의 제사를 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신라 무열왕이 죽었을 때 당나라 고조가 애도식을 거행한 적은 있다. 하지만, 사당까지 세우고 임금이 직접 애도식을 치르지는 않았다.

중국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 임금이 죽었다고 상복을 입고 임금이 직접 애도식을 주관하고 그 나라의 시조를 제사하는 사당을 지어준 사례는 없었던 것 같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어떤 황제가 죽었다고 임금이 직접 상복을 입은 적은 없었다.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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