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말머리]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회사에 친한 후배 녀석이 한 명 있다. 회사 밖에서도 자주 만나며 서로 흉금을 터놓다 보니, 그는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 뒤에 회사에서 부여한 직급을 붙이지 않고 형님의 사투리인 ‘햄’을 붙이고 있다. 퍽 정겨운 호칭이다.

나보다 고작 몇 살 어린 그를 나는 이따금씩 한참 어린 동생 취급을 하곤 한다. 까불까불한 모습과 장난스러운 말투도 나름 귀엽게 봐줄 만하다. 그가 아무리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육군장교로 복무했고 누구보다 신실하게 학창생활을 보냈다고 하지만, 내 눈엔 그저 어딘가 좀 어설퍼 보이고 약간은 풋내가 나는 귀여운 후배였다.

어느 날 그는 내게 갑자기 시집을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앞뒤 설명 없이 대뜸 물어오니 적이 당황스러웠다. 무슨 맥락에서 나온 질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 수개월 전에 경영경제 분야 도서를 출간한 선배니, 시집 출간도 남들보다는 잘 알지 않을까 싶었던 것 같다. 

ⓒ픽사베이

기획출판과 자비출판의 개념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줬고, 후자에 관심을 갖기에 요즘은 POD(Publish On Demand)라는 게 인기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현실 경제에 유난히 많은 관심을 쏟는 친구가 시적 감수성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그는 출판을 알아보는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시집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이 참 기특했다. 한참 연배가 더 높은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표현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기특했다 정말. 소개팅과 주식 이야기에 눈이 커지는 친구인데, 아버지가 SNS에 써온 시를 모아 책을 만들어 회갑 선물로 봉정하겠다는 생각.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와 왕십리역 근처 작은 술집에 가서 소주 몇 잔을 주고받았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58년생 개띠인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을 지니고 있는, 우리가 흔히 떠올려보는 그런 아버지였다. 일찍이 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20년 가까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 IMF와 맞닥뜨렸다. 그 후 오랜 도시생활을 접고 전원생활을 시작한다. 지금까지도 새 직장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해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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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아버지는 본인의 SNS에 시를 쓰기 시작했단다. 문자 메시지에 대한 답은 언제나 건조하기 그지없는 “알았다”일 정도로 무딘 중년 남성, 섬세한 감정 표현에 서투른 이 무심한 아버지는 당신이 지은 시에서만큼은 아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고, 홀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담았으며, 아들과 딸에 대한 진한 사랑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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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배가 아버지께 시집을 드리기 전 그 소중한 책자를 내게 조심스레 보여주었다. 제목은 ‘無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인생철학과 어쩐지 잘 어울리는 듯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중 몇몇 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들의 가훈>이라는 시에서는 아들(그 후배)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화목, 사랑이라는 글자를 입힌 판화를 가져온 것을 가훈처럼 걸어두고 있는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부모에게는/그 어떤 값비싼 그림보다도/그것이 가장 소중한 거다”라는 문장으로 이 시는 끝이 난다.

ⓒ석혜탁

<30주년>이라는 시에는 치열하고 성실하게 가장으로서 묵묵히 달려온 우리네 아버지의 초상이 엿보였다. 그는 말한다.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와도 위로 받지 말자.”  행여 조금이라도 약해질까 봐 자신을 다잡는 모습에 나의 아버지의 주름과 안경이 겹쳤다. 그래서 더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후배는 입영 훈련 때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보았다고 한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릴 적 어떤 이야기를 꺼내며 무언가를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식의 진로, 적성,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유익한 조언을 해주었던 스승 같은 멋진 아버지인데, 후배는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쓰는 그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無心

이번 글을 쓰기 전 빈 종이에 후배 아버지의 시집 제목을 수 차례 연필로 적어보았다. 無心,
無心, 無心, 無心. 어렵지 않은 이 한자를 적어 가는데,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 후배는 나의 이 부족한 글을 아버지께 인쇄해서 보여드릴 계획이라고 했다. 내년 퇴직을 앞둔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을 내 글을 빌려서라도 살짝 전하고 싶다는 것. 이 모자란 칼럼이 아들이 정성스레 만든 시집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아들의 속 깊은 생각이 멋쟁이 아버님께 잘 전달되기 바랄 뿐이다.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게 된 필자로서 감히 후배의 아버지께 몇 말씀 아뢰며 글을 마칠까 한다.

아버님의 시를 읽다 보니, 저희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아직 철없는 제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효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생 같기만 한 친구였는데, 아버님을 생각하는 마음씨가 무척 어른스럽네요. 그런 소양과 태도가 다 아버님의 영향과 가르침의 소산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저도 아버님의 아들처럼 속 깊은 아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 한번 같이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 모자란 글을 아버님께 바칩니다.

 석혜탁

-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저자. 
-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한다. 가끔씩 라디오에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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