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9]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조선시대 때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그야말로 ‘칙사 대접’을 했다. 황제를 대신해서 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후국으로서 황제 모시듯 한 것이다.

우선 중국사신이 국경지역인 의주에 도착하면 조선정부는 원접사(遠接使)를 보내서 맞았다. 곧바로 잔치까지 열었다. 잔치는 의주에서 뿐 아니라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모두 5 군데에서 열어주었다. 이때마다 2품 이상의 선위사(宣慰使)를 보내 대접했다.

사신이 한양 부근에 도착하면 임금이 직접 교외까지 마중 나가서 영접했다. 한양에 입경하면 이를 환영하는 하마연(下馬宴)을 열었다. 하룻밤을 쉰 다음날에는 익일연(翌日宴)을 차려주었다.

이와는 별도로 세자, 종친부, 의정부, 6조 등이 번갈아 가면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연일 잔치판을 벌인 것이다. 이랬으니 ‘칙사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이에 따른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은 조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조선출신 환관을 골라서 사신으로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도적으로 조선을 혼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행패는 대단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돌아가서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 뇌물을 바쳐야 했다. 조선에 남아 있는 자신의 일가친척에게 높은 벼슬을 주라고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은 ‘성상납’까지 요구했다.

세종대왕 때 지평 벼슬을 하던 박추라는 관리가 임금에게 보고했다. 중국 사신은 물론이고, 그 수행원들까지 노골적으로 ‘성상납’을 요구하고 있다는 상소였다.

“옛날에는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서 여기(女妓)를 요구하면 은밀하게 허락해주었습니다. 나라에서는 모르고 있는 것처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멋대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2∼3명씩 끼고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신 밑에 있는 자들까지 대놓고 음탕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소문이 중국에 퍼지면 우리나라 풍속을 어떻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끔찍하게 아끼는 임금이었다. 박추의 상소를 받고 기생 제공을 즉시 중단하라고 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박추의 보고는 묵살되고 말았다. 세종대왕은 이렇게 밝혔다.

“나라에서 모르는 것처럼 기생을 제공했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옛날에 최진(崔眞)이라는 사신이 왔을 때 함길도 기생을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번 하는 바람에 나라에서 그 기생을 불러다가 허락한 적이 있었다. 또 조종(祖宗) 때에도 그런 전례가 있었다. 게다가 기생이란 그렇게 아낄 것이 아니다.…”

박추가 상소를 한 것은 1442년, 세종 24년이었다. 얼추 600년 전이다. ‘여성의 인권’ 따위는 무시되던 시대였다. 게다가 약소국 조선은 양갓집의 처녀까지 명나라에 바쳐야 했던 시대였다. 중국 사신에게 기생 좀 제공했다고 해서 나라가 시끄러울 일은 없었다.

중국 사신의 ‘끗발’은 대단했다. 2∼3명이나 되는 ‘복수’의 기생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수행원까지 조선 여성을 노리개로 여기고 있었다.

뇌물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염등(冉登)이라는 명나라 사신은 은폐(銀幣)를 한없이 강요했다. 그 바람에 나라 안이 텅 비도록 없어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를 꼬집는 글을 지었다.

“불꽃 바람이 삼한을 모두 말아가지고 가니(炎風捲盡三韓去), 단지 산천만 남아서 옛날과 같구나(只有山川似昔時).”

염등의 ‘염(冉)’을 발음이 같은 ‘염(炎)’자를 써서 ‘염풍’이라고 빗댄 것이다. ‘지봉유설’은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보기를 ‘이익을 도모하는 소굴’로 여기고 있다고 쓰기도 했다.

고려 때 원나라 사신의 행동도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이들은 격식을 따르지 않고 털로 만든 자신들의 모의관(毛衣冠)을 입은 채로 고종 임금을 만나려고 했다. 심지어는 활과 창까지 휴대하려고 했다. 옷과 허리띠를 주면서 갈아입으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겉옷만 걸친 채 임금을 만났다.

사신들이 임금과 나란히 앉으려고 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고려의 국사(國事)를 통괄하려고 왔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객관이 적적하다며 인가로 옮기겠다고 떼를 쓰다가 금주기(金酒器)와 저포(紵布)를 주니까 잠잠해지기도 했다. 노골적으로 뇌물을 받아 챙긴 것이다.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파워’가 막강했던 고구려 때는 달랐다.

영류왕은 평상에 앉은 채로 당나라 사신 이의염(李義琰)을 만나줬다. ‘열’ 받은 이의염은 자기가 ‘천자의 사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고구려 임금과 대등한 관계라고 우기고 있었다. 이후, 이의염의 동생 이의침(李義琛)이 사신으로 왔다. 영류왕이 앉은 채로 이의침을 부르자, 엉거주춤 기어와서 절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영류왕 앞에 엎드려 있었다.

문자왕이 방량(房亮)이라는 북위에서 온 사신의 접견을 거부한 사례도 있다. 외교상 ‘결례’였지만, 북위는 고구려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동천왕 때는 오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천왕은 그 사신의 목을 쳐서 오나라와 관계가 껄끄러운 위나라로 보내버렸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침략을 앞두고, 사신을 모집했다. 신하들이 눈치만 보며 기피하는데 장엄(蔣儼)이 자청해서 나섰다. “천자의 웅위 때문에 사이(四夷)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는데 작은 나라가 감히 왕인(王人)을 도모하려고 하니 만약 불행이 있으면 진실로 내가 죽을 곳이라 하고 드디어 사행(使行)을 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장엄을 굴실(窟室)에 감금하고 말았다. 당 태종은 나중에 풀려나서 돌아온 장엄을 ‘조산대부’, ‘유주사마’, ‘회주자사’, ‘전중소감’으로 출세시켰다.

당나라 태종은 상리현장(相里玄獎)을 사신으로 보내 연개소문을 설득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상리현장은 태종의 말을 전달했다. “만약에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 군사를 발하여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되레 “수나라가 우리를 쳐들어왔을 때, 신라가 빈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았다. 스스로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지난 2010년, 중국 국무위원 다이빙궈(戴炳國)의 방한(訪韓)이 논란이었다. 갑작스럽게 방한하겠다고 통보하더니, ‘비자’도 없이 서울 거리를 활보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만날 때 배석했던 후정웨(胡正躍) 부장조리는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앉아 있기도 했다. ‘부장조리’는 우리나라의 ‘차관보급’인데,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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