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만일 우리가 주어진 운명을 미리 알 수 있어서 앞으로의 일을 대비할 수 있다면 세상 살기가 얼마나 수월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특히 내가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상당부분을 영어로 인해 고통받을 줄 알았더라면 학교 다닐 때 영어를 그토록 소홀을 넘어 미워할만큼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영어의 기초를 다져야 할 중요한 시기에 영어는 물론 대부분의 공부를 제쳐 놓았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갑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기를 쓰고 공부했지만 특별한 효험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 벼락치기로 효험을 볼 리가 없다. 고등학교 때 내게 2년씩이나 영어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항상 나의 성실치 못함과 게으름을 탓하곤 했는데 아마도 그 대가를 내내 치루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픽사베이

몇 년 전 뉴욕에 갔을 때 브로드웨이의 한 극장에서 뮤지컬 ‘라이온킹’을 본 적이 있었다. 내용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어서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배우들의 멋진 노래와 대사를 들으면서도 느낌이 오질 않았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 속에 막연하게 남아있던 아쉬움들이 결국은 언어의 장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에 다시 라이온킹을 서울에서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배우들의 대사는 물론 한숨소리까지 심지어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침묵의 의미까지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바로 나의 모국어, 한국말로 된 뮤지컬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조카들은, 미국에서 오래 살다보니 이젠 영어 때문에 겪어야 하는 불편이 많이 없어졌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미국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TV를 볼 때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다고 한다. 조카들의 바램은 우리가 ‘나쁜 형사’나 ‘개그 콘서트’를 볼 때처럼 다림질도 하고 신문이나 책을 보면서도 한쪽 귀로는 내용이 훤히 들려오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는데, 그쯤은 되어야 남의 땅에서 사는 이방인이란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이 아니겠는가.

가끔 주위에서 언어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별다른 노력없이도 수월하게 외국어를 익히는 것같아 부럽기만 하다. 기록을 찾아보니 외국어를 배우는데 천부적인 자질을 보였던 사람들 중 하나는 아마도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해 낸 슐리만이 아닐까 한다. 북부 독일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아버지에게서 라틴어를 배워 열살이 되던 해에 벌써 라틴어로 트로이 전쟁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작문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는 외국어로 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워버리는 방법으로 다른나라 말을 습득했다고 하는데, 한가지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게 되는데 6주일 이상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무려 18개국의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여행기를 쓸 때는 반드시 그 나라 말로 기록을 했다고 하니 믿어야 할지조차도 모르겠다. 슐리만과 같은 언어의 천재 이야기는 모국어 외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영어를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애를 써야 하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영어 습득의 첩경을 묻는 내게, 미국 펜타곤에 근무하는 선배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좋은 대사가 나오면 그것을 몇 번이고 따라하면서 기억해 놓았다가 미국인들과 대화 도중에 사용해 보라고 자신의 영어공부 비법을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꿈을 영어로 꿀 수 있어야 비로소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는데... 비법 전수는커녕 그 순간부터 나는 그나마의 영어조차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한국에서도 공연한 바 있는 셀린 디옹이란 여자 가수가 있다. 캐나다의 불어권에서 태어난 그녀는 세계적인 가수로 대성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깨닫고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녀는 정말로 영어로 된 꿈을 꾸게 되었고, 그날 이후 영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셀린 디옹과 같은 꿈과 집념은커녕 조그마한 절제도, 조그마한 참을성도 없는 나는 이제까지 영어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미국사람이 나타나 안타까워했던 꿈을 꾼 적이 있어 꿈조차 무서워했던 적은 있다. 영어 때문에 의사소통은 물론 작은 일들까지도 고통을 받는다고 하소연하는 내게 펜타곤 선배는 깔깔대며 다시 한번 꿈을 강조했다. “꿈까지도 영어로 꾸도록 노력해 보라. 그 꿈길을 찾아가다 보면 어느덧 길이 보일 거다. 비록 끝이 없이 가야 하는 멀고도 먼길이지만 말이다”

영어로 꿈을 꾸려는 노력이 어떤 노력인지도 모르거니와 나는 그런 노력을 할 것 같지가 않다. 삶이 너무나 피곤하고 힘들어 자리에 누우면 바로 잠에 빠지는데다가 설사 꿈을 꾼들 신문사가 파산하거나 빚쟁이가 목을 짓누르는 악몽을 꿀 뿐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독직과 뇌물 수수혐의로 쫓겨난 공 모 교육감이 소신을 가지고 강력 추진했다는 <국제중학교>의 오늘을 보면서, 어떤 교육 현장이든 진정한 욕구와 소망, 실상과 희망을 바탕으로 하지 못한 교육과 현장이 얼마나 황폐해져가며 교육을 망치고 있는지 생각나서 써봤다.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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