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10]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만주 벌판에 엄청나게 넓은 숲이 있었다. 그곳에는 온통 나무뿐이었다. 며칠 동안을 걸어도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도끼 자국조차 없는 ‘처녀림’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 삼림을 ‘수해(樹海)’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나무바다’라는 뜻이다. 삼림이 너무 넓고 깊어서 마치 바다처럼 푸르기 때문에 ‘수해’였다.

수해는 대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우거진 숲이 햇빛마저 차단했기 때문이다. 수해 속을 걸으면 마치 바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나무바다’였다.

중국 사람들은 수해라고 불렀지만,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이렇게 썼다.

“우리 고어(古語)에 삼림을 갓 혹은 가시라 하니… 수천 리 무제(無際)의 삼림해(森林海)를 이룬 고로 ‘가시라’라 칭하니, 가시라는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신채호는 또 “가시라를 옥저(沃沮)라 기(記)한 바, 옥저는 와지의 역(譯)이요, 와지는 만주어의 삼림이니…”했다.

만주 벌판에 있는 삼림은 우리 역사책에 나오는 옥저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그 옥저를 오늘날의 함경도인 ‘남옥저’와 두만강 건너의 ‘북옥저’로 구분했다. ‘북옥저’에는 당연히 ‘연해주’도 포함되고 있었다.

ⓒ픽사베이

일제는 중국을 침략했을 때 이곳에 ‘집단부락’이라는 것을 여러 개 만들었다. 평야에 토성을 쌓고 마적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최소한 70가구를 기준으로 부락을 만들었다. 성벽에는 3∼4m 간격으로 총구멍을 만들고 철조망도 쳤다. 밖에는 해자도 팠다.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

일제는 도보로 2∼3시간 정도 떨어진 곳마다 이런 ‘집단부락’을 만들었다. 그래야 서로 쉽게 연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수해 속에 있는 ‘집단부락’은 마치 바다에 있는 작은 섬에 지나지 않았다.

‘중일전쟁’ 때는 이 수해에서 낙오한 일본 병사들이 무수하게 죽어 갔다. 어떤 패잔병은 이런 글을 남겼다.
“맨 처음 버린 것이 방독면, 두 번째는 허리에 차는 탄대였다. 다음은 총을 버렸다. 모포, 배낭, 반합, 물이 떨어진 물통도 버렸다.… 팔다리가 무겁고 심지어는 불알 두 쪽까지 무거워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이 언덕만 넘어가면 들판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하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막상 올라서면 또 다시 나무숲의 바다가 펼쳐졌다. 그러면 수류탄 자폭음이 울렸다.…” <일본의 중국 침략, 요미우리신문 사회부 발행, 박준황 옮김>

수해 속에서 소위 ‘황군정신’ 따위는 없었다. 수류탄이 없는 병사는 그냥 죽을 때를 기다려야 했다.

이 수해, 옥저의 주인이 ‘조선 호랑이’였다. 조선 호랑이는 바다처럼 넓은 숲을 누비며 주인노릇을 했다. 조선 호랑이에게는 적이 없었다. 당당하게 활보했다. 그 넓은 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봐야 그야말로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그 조선 호랑이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열하일기’의 앞부분인 ‘도강록(渡江錄)’에 나오는 글이다.

“만주 땅에서 밤을 맞게 되자 사람들은 30여 군데에 횃불을 켜놓았다.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다가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혔다. 군뇌가 나팔을 한 번 불면(軍牢吹角一聲), 300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밤새도록 외쳤다. 호랑이를 경비하기 위한 것이었다(所以警虎也).…”

만주 벌판에는 호랑이가 이렇게 많았다. 밤새도록 횃불을 밝히고 시끄러운 소리를 질러야 접근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조선 말 우리나라를 여행한 영국 할머니 이사벨라 비숍(1831~1904)도 호랑이 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호랑이와 귀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밤에는 거의 여행하지 않는다. 야행할 경우 길손들은 보통 몇몇이 서로 끈으로 묶고, 등롱을 밝히고, 횃불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꽹가리를 치며 길을 간다.”

뒤늦게 만주 벌판으로 ‘이민’한 중국 사람에게는 조선 호랑이가 공포의 대상이면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호랑이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그만큼 무서워했다.

조선 호랑이는 이마에 ‘임금 왕’자가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조선 호랑이를 ‘왕대(王大)’라고 불렀다. 중국 발음으로는 ‘왕따’다. 희한하게도 우리가 집단 따돌림을 ‘왕따’라고 하는 것과 발음이 비슷하다. 조선 호랑이 ‘왕따’도 혼자서 삼림을 돌아다녔다.

이랬던 조선 호랑이가 ‘백두산 호랑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광활한 만주 벌판이 아닌 백두산으로 오그라든 호랑이가 된 것이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표현은 고작 백두산에 있는 호랑이를 의미할 뿐이다. 만주벌판에서 포효하던 조선 호랑이를 깎아내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사람들이 백두산 호랑이라고 ‘평가절하’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조선 호랑이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새해 첫날 ‘호랑이 기(氣) 받기’ 특별 개관을 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백두산’ 호랑이의 우렁찬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갇혀 있는 상태의 호랑이가 ‘기’를 얼마나 내뿜을 수 있을지 의아스러웠다. 그것도 조선 호랑이도 아닌 백두산 호랑이가.

유명한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고구려 무사가 호랑이를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호랑이가 내뿜는 게 아마도 ‘진짜 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꼼꼼한 사람은 수렵도의 ‘화살촉’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뾰족해야 할 화살촉이 뭉툭하게 보인다는 의문이다.

하지만 뭉툭한 화살촉은 ‘위력’이 크다고 했다. 뾰족한 화살촉보다 사냥감에게 훨씬 큰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맹수를 쫓을 때는 뭉툭한 화살촉이라고 했다. 고구려 무사는 그것으로 호랑이와 대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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