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잡설]

[오피니언타임스=김부복] 고교시절이었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여름방학 때였다.

나는 모처럼 책가방을 꾸려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 학교 도서관에서 밀린 공부 좀 할 참이었다.

그러나 공부는 제쳐둬야 했다. 도서관에서 같은 반 친구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제안했다.
“우리 반 아무개 있잖아. 그 자식 집이 시골이잖아. 근데 방학 때 집에 갔다가 그저께 올라왔대. 그 친구 하숙집이 학교 뒷문 근처에 있거든. 만나자고 연락 왔는데 같이 가서 볼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책이 머릿속으로 들어올 것 같지도 않았다. 날씨가 좋아서 도서관이 갑갑하기도 했다. 우리는 즉시 출발했다.

학교 뒷문에서 작은 도로를 건너면 주택가였다. 집이 다닥다닥 몰려 있었다. 우리는 두 명이 나란히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골목을 꼬불꼬불 돌아서 아무개네 하숙집을 찾아갔다.

ⓒ픽사베이

아무개는 고등학교 때부터 하숙생활이었다. 그 하숙집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잠깐 떠들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무개는 나에게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을 자세하게 알려줬다.
“저쪽으로 똑바로 가면 세 갈래 길이 나와. 거기서 맨 왼쪽 길로 가면 또 세 갈래 길이 나와. 그리고 세 갈래, 네 갈래 길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맨 왼쪽 길로만 따라가면 버스정류장이 금방 보일 거야.”

맨 왼쪽 길로만 가라는 말이 조금 ‘거시기’하게 들렸지만, 나는 아무개가 시키는 대로 골목의 왼쪽 길을 따라갔다. 과연 서너 갈래 길이 연속해서 나타났다. 그 때마다 왼쪽 길을 따라서 걸었다. 골목은 여전히 두 명이 걷기도 껄끄러울 정도로 좁았다.

그렇게 30분쯤 걸었다. 그제야 조금 넓은 길이 나타났다. 나는 그 길을 따라서 또 걸었다. 그래도 버스정류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같은 반의 또 다른 친구였다. “너, 오랜만이다, 어디 가냐” 묻고 있었다.

“버스 타러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면서 나를 앞질러갔다. 
“야, 이놈아. 버스를 타려면 반대쪽으로 가야지. 너는 지금 학교 쪽으로 가고 있잖아. 나 먼저 간다.”

나는 학교 쪽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어쩐지 익숙한 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러고 나서야,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보았다. 희한한 게 있었다. 30분 남짓 걸은 것 같았는데, 그 사이에 시간은 3시간 넘게 흐르고 있었다. 땅거미가 슬슬 질 시간이었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방학 때였는데도 골목을 헤매는 동안에는 땀을 전혀 흘리지 않았다. 길을 찾고 난 다음에야 잔등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식은땀이었다.

또, 골목 안에서는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았다. 도시락을 막 까먹은 대낮인데도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았다.

골목을 헤매면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혼자였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골목에는 인적이라고는 아예 없었다. 강아지 짖는 소리조차 없었다. 적막했다. 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혼자서 걷고 있었다.

30분, 또는 3시간 동안 헤맨 골목에 있던 집의 모양이 모두 똑같았다는 것도 이상했다. 하나같이 야트막한 담에 우중충한 색깔의 집이었다. 울긋불긋하거나 밝은 색깔의 집은 하나도 없었다.

아득한 고교시절의 추억(?)이지만, 나는 지금도 ‘4차원’에 빠졌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짧은 4차원 경험’이었다. 친구가 어깨를 툭 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 경험은 조금 더 길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뫼비우스의 띠’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서 출발하면 두 바퀴를 돌아서 처음의 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2차원’의 세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3차원’을 잠시 벗어나 ‘2차원’ 또는 ‘4차원’을 경험한 셈이었다.

이 단 한 번의 경험 이후 나는 난데없이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는 사람의 얘기를 ‘남의 일’처럼 여기지 않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는 인도네시아의 바닷가에서 홀연히 사라졌다가 1년 6개월이나 지나서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난 여성을 MBC의 ‘신기한 TV 서프라이즈’가 소개하고 있었다. 이 여성은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서 ‘2차원’인지 ‘4차원’인지를 경험하고 있었던 듯 싶었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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