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제가 어렸을 적에는 지금보다 눈이 흔했습니다. 기억이 흔히 저지르는 과장 탓인지는 몰라도, 겨우내 눈이 내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 살았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강원도에는 눈이 지붕까지 덮었다더라”, “산골에서는 집집마다 동아줄을 연결해 놓았다가 눈이 많이 내리면 굴을 뚫어 왕래한다더라”고 들었던 이야기들이 전부 거짓이 아니라면 지금보다 눈이 많았던 건 분명합니다.

강원도하고도 깊은 골짜기라고 할 수 있는 인제의 산골에 들어와서 첫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손을 꼽아 봐도 이번 겨울 들어 두어 번밖에 눈 구경을 하지 못했습니다. 내린 양도 그리 많지 않아서 발목까지 빠진 적도 없습니다. 추위도 생각보다 덜 합니다. 아직은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적이 없으니까요. 물론 아직 본격적인 추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말은 춥지 않다고 하지만 산골의, 좀 허술하게 지은 집에서 혼자 겨울을 나는 게 보통 일은 아닙니다. 심리적 추위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바람이 유난하게 부는 밤이면 잔뜩 웅크리고 앉아 어릴 적 그 혹독했던 추위를 생각하고는 합니다. 뒷산 소나무들이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뚝뚝! 가지를 내려놓던 밤은 무겁고도 길었습니다. 소쩍새의 울음도 겨울이 깊어갈수록 슬픔을 더했습니다. 허기진 배 때문이었는지 ‘솥적다, 솥적다’고 운다는 전설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군불을 제대로 때지 못한 방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도 추웠습니다. 초저녁에 잠깐 아랫목에 훈기가 다녀가고는 내내 냉골이었습니다. 윗목의 요강까지 꽁꽁 어는 밤이었습니다. 자꾸 할머니의 품을 파고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픽사베이

어제 저녁 뉴스를 보려고 잠깐 켰던 TV에서, 가스가 끊겨 할머니와 꼭 끌어안고 자는 어린 아이를 보았습니다. 특별한 프로그램은 아니고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을 독려하는 ‘광고’였습니다. ‘아동복지시설 악용’ ‘후원금 꿀꺽’ 같은 뉴스 자막이 머릿속에서 겹치면서, 그런 식의 모금 광고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상황 자체가 거짓은 아니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안온과, 스스로 불우하다고 생각한 날들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TV를 끈 뒤 내내 21도로 놓고 지내던 보일러를 17도로 내려놓았습니다. 남은 겨울 그렇게 살기로 했습니다. 조립식 주택이라 웃풍이 조금 강한 편이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한데서 자는 사람도 많은 세상이니까요. 찬 기운을 이기려고 옷을 껴입고, 양말까지 신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7도는 대처보다 조금 더 추운 내설악에서 기름보일러가 얼어터지지 않게 하기 위한 최저 온도입니다. 보일러가 얼면 비용이 꽤 들어가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낮출 수는 없습니다.

좀 춥게 자면서 아낀 돈을 겨울나기가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보태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깟 푼돈을 보내면서 생색을 내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은 여전히 금과옥조니까요. 게다가 알게 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제 작은 손짓이 지갑 열기를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마중물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씁니다. 최소한 마음이라도 함께 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제가 오늘 좀 춥게 자면 누군가는 따뜻한 밥 한끼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월급 받는 직장에 다닐 때는 어려운 사람들을 조금씩 도왔는데, 퇴직 후 직업 없이 지내면서부터는 대부분의 상황을 외면했습니다. 제 스스로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탓입니다. 산골마을에 들어온 뒤부터는 지출을 거의 중단했습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먹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읍내에 있는 마트라는 곳을 거의 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돌아보면 풍요로운 날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도 않거니와 시골에서는 조금만 움직이면 어지간한 찬거리 정도는 스스로 구할 수 있으니까요. 또 먹을 것, 입을 것을 챙겨 보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안온하다고 남들도 안온한 줄 알며 살아온 건 아닌지 새삼 돌아보고 있습니다.

해마다 연말이면 ‘불우이웃돕기 행사’ ‘불우이웃돕기 성금 기탁’ ‘온정의 손길 답지’ 등의 키워드를 담은 기사가 쏟아집니다. 지난 연말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것이라도 나누겠다는 마음보다는, 형식적인 행사 혹은 생색내기에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방송 화면이나 신문 지면에 이름 한 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성금과, ‘선행’을 홍보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물론 그조차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그렇게 모아진 돈이 어렵게 겨울을 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꾸준하게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이 좀 더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백화점 세일 행사처럼 연말에만 떠들썩하게 판을 벌이는 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조금씩 나눠주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니 나눔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전히 봄은 강남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추위를 조금 견디면서 봄을 당겨쓰기로 했습니다. 난방 온도를 내려도 스스로 따뜻한 이유입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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