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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달라진 국방백서[김준범의 동서남북]
김준범 | 승인 2019.01.21 08:30

[논객닷컴=김준범] 국방부가 ‘2018 국방백서’에서 ‘북한은 적(敵)’이라는 종전의 표현을 다른 말로 바꿨다고 15일 발표하자 일부 보수 언론과 야당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안보포기’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문재인 정부가 이번 백서에서 주적 표현을 삭제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기존의 용어를 달리 표현했을 뿐이다.

‘북한=주적(主敵)’ 표현은 이미 노무현 정부시절인 2004년부터 없어졌다. 이에 앞서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부터는 주적 표현이 적절치 않다는 여론이 많아 용어 사용을 중단한 상태에서 매년 발행하던 백서도 격년제로 주기를 바꾸었다. ‘주적’ 표현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용어사용도 하지 않음으로써 야당의 공세를 피해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육군

국방부는 이번 백서에서 ‘북한은 적’이라는 표현 대신 “대한민국의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모든)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기술했다. 특정 국가나 단체 같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하지 않고, 우리의 주권과 생존, 영토와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원칙적이고 포괄적으로 개념을 정의(define)해 놓은 것이다.

오직 북한만을 대한민국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적으로 규정했던 1995년 국방백서 이후 적에 대한 개념규정을 이처럼 포괄적이고 원칙적으로 정의하고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만을 유일한 적으로 못 박았던 기존의 경직된 적 개념을 원칙적이고 포괄적이며 유연한 개념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적 개념의 다변화로 해석할 수도 있는 셈이다.

국방부는 종전의 ‘적’ 표현을 바꾼 것에 대해 “북한의 위협뿐만 아니라 점증하는 잠재적 위협과 초국가적·비군사적 위협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를 기술했고, 2018년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남북관계 등을 고려했다”고 ‘적’ 표현의 변경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해 열린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 4.27 판문점선언과 9.19 남북 군사분야 합의이행 등 급속히 진전된 한반도와 주변 정세 등 변화된 환경에 맞춰 적 표현을 바꿨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이번 조치는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 남북관계의 바람직한 발전방향 등을 감안해 볼 때 국방부가 모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로 높이 평가된다.

국군을 양성하고 있는 나라는 대부분 국방백서를 발간하고 있다. 그런데 국방백서에 특정 국가를 가리켜 ‘저 나라가 우리의 적(또는 주적)이오’라고 명시한 나라는 대한민국 말고는 없었다. 우리나라가 처음 국방백서를 발간한 것은 미·소 냉전체제와 한반도 긴장이 최고 수위에 달했던 1967년이었다. 그 이듬해 역시 △1.21 김신조 등 청와대 기습사건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납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으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70년대 한국의 군은 흔히 ‘유신의 군대’로 불렸다. 그 시절 병사들은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이라는 멸공구호를 매일 아침 점호시간에 목청껏 외쳐대곤 했다.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철저히 주입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서는 더 이상 발간하지 못했고, 20년이 지난 1988년에 이르러서야 창군 40주년 기념으로 다시 발간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런 가운데서도 전두환·노태우 등 군사정부 시절의 국방부는 ‘북한은 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한=적’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군부종식을 외친 1995년 김영삼(YS) 문민정부 때였다. 그 1년 전 3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열린 판문점 접촉에서 박영수 북한측 대표가 한 ‘서울 불바다’ 발언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사태로 치달았고, 그런 상황 속에서 발간된 국방백서에 ‘북한은 주적’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18년, 전두환·노태우 12년 기간에도 없던 일이었다.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군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한 YS가 대북정책에서만은 냉·온탕을 오가던 중 끝내 신중치 못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북한=주적’을 외치는 사람들은 대답해야 한다. 과거 군부정권 30년 동안에는 왜 주적 표현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못했고, 그 때는 왜 안보를 포기한 정권이라고 말하지 못했는가?

1995년 국방백서에 ‘북한=주적’ 표현이 처음 등장하자 일본·중국 등에서는 ‘북한이 주적이면 우리는 부적(副敵)이냐’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국방백서를 발행하는 어떤 나라도 ‘주적’이니 ‘적’이니 하는 용어를 명기(明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상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활자로 명기하는 것이야말로 전략적 모호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자. 세계 최강의 미군은 ‘위협’(threat), 러시아는 ‘근본위협’으로, 통일전 서독에서는 동독을 ‘군사적 위협’이라고 했다가 통일 이후에는 불특정 위협을 뜻하는 ‘도전’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아랍국가들 △중국-대만(臺灣) △인도-파키스탄처럼 교전중이거나 전쟁의 위험에 항시 노출돼 있는 나라들도 상대국을 ‘주적’이라고 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 같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중국은 용어사용에 가장 신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대수(對手)’인데, 이는 전쟁 가능성이 거의 없는 외국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한다. △‘적(敵)’은 교전중일 때 △‘가상적(假想敵)’은 장차 전쟁을 하게 될 때만 사용한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주중(駐中) 무관 출신 한 예비역의 설명이다.

2004년 노무현의 국방부는 ‘주적’ 표현 대신 △‘직접적 군사위협’ △‘심각한 위협’ 등으로 바꿔 사용하다가 2006년에는 △‘현존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으로 좀 더 순화된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을 겪고 난 이명박 정부는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종전의 표현을 복구시킨 뒤 박근혜 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번에 나온 백서는 격년제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처음이다.

남북정상이 지·공·해상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온 세계에 약속했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군사합의서가 체결됐으며, 비무장지대(DMZ) 안의 감시초소(GP)를 파괴하고 상호 검증, 확인까지 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옛날처럼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튼튼한 국방은 국방백서에 ‘주적’ 같은 표현만 써 넣는다고 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마치 대문 위에 시뻘건 부적(符籍)을 써 붙여 놓고, 이젠 도둑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미신처럼 어리석은 행위는 없을 것이다. 국방은 합리적인 과학·기술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종합예술이다. 주적이니 부적이니 하며 부적과도 같은 표현의 문제를 놓고 지극히 소모적인 이념논쟁이나 벌일 만큼 한가한 놀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준범

 80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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