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의 에코토피아]

[오피니언타임스=박정애] 아침마다 뒷산에 오른다. 넉넉잡아도 왕복 40여 분의 산길이 가까이 있어줘서 고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묵묵히 헤쳐나갈 수 있게 해 주는 내 의지의 원천이 바로 산행이다. 산행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몸이 아파 드러누웠거나 정신적으로 황무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고맙다, 산.

어릴 적 낯선 곳을 가느라 혼자 걸을 때 나는 고독과 동시에 자유를 느꼈다. 그것은 한없이 슬프고도 벅찬 그런 감정이었다. 젊었을 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열 번도 넘게 가 보았다. 소백산, 오대산, 태백산도 좋아해서 여러 번 올랐다.

그래서일까? 처음엔 동네 뒷산이 도무지 마음에 차지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뒷산에 오를 때는 젊은 시절 산악회 활동을 하며 다녔던 전국의 유명산들을 테마로 한 산행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등산로 입구에 선 순간 ‘오늘은 지리산 철쭉 산행이다.’ ‘이번엔 설악산 단풍 구경을 떠나볼까?’ 하는, 비록 몸은 뒷산을 걷지만 마음으로는 옛 추억을 더듬으며 유명산들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픽사베이

이렇게 옛 산행 추억들을 더듬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뒷산 산행의 막바지에 이르곤 했다. 뒷산은 광교산의 한 줄기로 산이 계속 이어졌다면 광교산까지 갈 수 있는 코스였지만 아쉽게도 산이 잘려 그럴 수가 없었다.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도로 건너편 산과 길이 끊긴 것이다. 내 아침 산행의 최종 코스도 끊긴 부분까지였다. 나는 맨손 체조를 하며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오던 길로 되돌아 왔다. 다시 집으로 오는 길에는, 내일은 어느 산의 추억을 더듬을 것인지 추억의 여기저기를 클릭해보면서 말이다.

한동안 나의 뒷산 산행은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산행 내내 지리산 설악산 소백산 산행을 추억하며 내가 동네 뒷산을 걷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뒷산에겐 다소 오만하고 미안한 산행을 한 것이다. 사실 뒷산뿐만이 아니라 지나온 내 삶과 현재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항상 불만족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 말이다. 시인 최승자 님의 ‘내 청춘의 영원한’이란 시의 시구처럼 나는 항상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어 했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전국의 명산과 백두대간, 한북정맥, 한남정맥 등을 누비고 다녔던 옛 추억을 음미하며 1년 동안 동네 뒷산을 오르던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추억은 잊고 뒷산에 집중하고 있었다. 짧은 오르막과 긴 능선길이 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이 나올 때도 있었다. 아파트 바로 뒤에 이런 산길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뒷산 산행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뒷산을 걸으며 힐링을 해 왔듯이 내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이웃이 나라는 존재를 통해 힐링을 누릴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보람된 삶인가를 말이다. 내 스스로 무엇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한 잔의 생수, 한 장의 손수건이 되어 갈증을 달래주고 땀을 닦아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내가 청춘을 통과해버렸다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뒷산을 닮아가는 이 중년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걷고 싶다. 나를 치유해주고 내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도록 늘 내 가까이서 편안한 길을 내어 준 나의 뒷산. 이젠 사랑하는 이들이 치유 받고 성숙해질 수 있도록 내 자신이 그들의 뒷산이 되어주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박정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수필가이자 녹색당 당원으로 활동 중.
숨 쉬는 존재들이 모두 존중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해 하나하나 실천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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