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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휴게소 시점[이명렬의 맹렬시선]
이명렬 | 승인 2019.02.11 08:40

[논객닷컴=이명렬] 15년 전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나서 명절에는 어떻게든 부산행 열차표를 구했다. 인터넷 예매가 실패한 날이면 4호선 첫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현장 잔여석을 구매한 적도 있다. 비록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처량한 뒷모습이나마 아침 뉴스 참고화면으로 실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런 열차 신봉자가 올해는 호기롭게 자동차를 운전해서 가겠노라 선언했다.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하고 대기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차로 운전해도 열차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이 섰다. 편도 380km의 거리가 만만해 보였다.  

결과부터 얘기한다면 2월 3일 귀경길에 8시간, 2월 5일 귀성길에 12시간 30분이 걸렸다. 실패다. 감기에 걸린 딸아이의 컨디션을 고려해 출발 시간을 애매하게 정한 탓도 있지만, 정체가 예상 밖으로 심했다. 날쌘 자객처럼 정체 구간은 시시각각 도로 위를 엄습했고, 국도로 노선을 바꾸며 도망을 쳐도 이동 거리가 늘어나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다림의 연속이다. 유일한 낙은 미리 준비해둔 주전부리, 딸아이 애니메이션이 가득한 넷플릭스, 그리고 휴게소였다.  

Ⓒ픽사베이

2~3시간 간격으로 휴게소에 들렀다. 명절이라 주차장 빈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 어렵사리 주차를 끝내면 먼저 화장실부터 찾아야 한다. 여자 화장실은 항상 줄이 길고 붐비기에 서둘러야 한다. 급한 용변을 해결하고 나서야 휴게소 투어가 시작된다. 어렵사리 들른 휴게소를 그냥 지나칠 순 없는 법이다. 입구의 분식 코너, 편의점, 푸드코트, 특산물 코너 등을 둘러본다. 이번 명절에 무려 6군데의 휴게소를 들렀지만, 휴게소마다 큰 차이는 없었다. 지역 특산물을 넣은 음식들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우긴 했지만 대동소이했다. 몇 군데 휴게소를 들르고 나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따분하고 재미가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예전 주막(酒幕)과 유사하다. 주막에는 장돌뱅이들과 길가는 나그네들이 모여들었다. 지친 방랑자들은 모주 한잔과 해장국에 자신의 인생역정을 털어놓는다. 유명한 장터들의 잘 팔리는 물품들과 장사 노하우가 공유되고, 때로는 지역의 따끈한 속보들도 전해진다. 주막은 나그네들에게 쉼터이자 새로운 정보가 공유되고 융합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휴게소는 주막의 기능에서 더 축소되었다. 이제 휴게소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은 없다.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이 최적화된 여행 정보를 제공해준다. 휴게소에서 오로지 맛있는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 급한 용변을 해결하면 된다. 그거면 족하다.

하지만 휴게소에 맛있는 음식이 있는가? 휴게소에서 음식을 먹고 위안을 얻은 적이 있는가? 이번 명절 기간 동안 휴게소에서 시킨 우동에서는 육수를 오래 끓였는지 탄내가 진동했고, 4000원짜리 핫도그의 소시지는 짜고 핫바는 질겼다. 갓 구워낸 호두과자의 냄새는 그윽했지만, 팥소에는 설탕 맛이 가득했다. 그래도 먹겠다는 손님은 넘친다. 주모 혼자서 운영하는 주막과 달리 휴게소는 많은 자본과 인력이 투자되고 위탁 운영을 거치면서 수수료와 인건비가 크게 늘어나는 구조다. 굳이 홍보 하지 않아도 손님이 알아서 찾는 시스템에서 ‘맛’과 ‘가성비’를 찾는 건 소비자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최근 연예인 이영자가 출연하는 ‘전지적 참견 시점’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휴게소 음식을 소재로 다뤄 이슈가 되었다. 이른바 휴게소 맛집 로드라며 특정 휴게소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들을 추천해 주었다. 이영자가 추천한 음식들이 삽시간에 동나기도 한다. 이제 소비자들도 용감해졌다. 맛난 음식이 있는 휴게소를 들르기 위해 급한 용변을 참을 용기가 생긴 것이다. 새로 생기거나, 이색적인 관광자원이 있는 휴게소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최근 V자 형태로 도로 위에 새롭게 지어진 내린천 휴게소에 들르려고 했더니 휴게소 입구에 대기 줄이 너무 길어 지나친 경험도 있다. 휴게소도 정보의 홍수 속에서 원치 않는 경쟁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내가 휴게소 음식에 바라는 것은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가 아니다. 운전으로 지친 빈속을 달래 줄 수 있는 적당한 맛과 가격, 그리고 음식에 나만의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기회가 필요하다. 휴게소 음식을 먹고 ‘잘 먹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할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일본에선 ‘에끼벤’이 이미 문화로 자리 잡았다. 지역 특산물이나 특정 주제로 열차 도시락을 만들고 한정된 지역에서만 판매한다. 에끼벤 종류만 해도 500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열차 안에서 지역 한정 도시락을 먹으며 나만의 추억을 만들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공급자는 음식에 개성적인 스토리를 담고, 소비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소비한다. 조금 비싼 가격도 용서가 된다.

우리네 휴게소도 점차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삼국유사군위휴게소처럼 복고풍의 재미난 컨셉을 잡거나, 문경휴게소의 오미자 돈가스처럼 지역 특산물 음식을 만드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울며 겨자 먹기로 내키지 않는 음식을 주문해야 하고, 낮은 음식의 맛과 질에 기분이 나빠지는 휴게소도 많다. 한 번에 바뀌진 않겠지만, 자기만의 특색있는 이야기를 가진 휴게소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애써 찾아가지 않아도 급하게 들른 휴게소에서 맛나고 매력적인 음식을 만난다면 더욱 풍요로운 여행이 되지 않을까? 물론 다음 명절에는 기필코 새벽에 일어나 열차표를 구할 예정이다.

이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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