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빈의 위로의 맛]

병에는 장사 없다

지난 주 급성 장염으로 4일을 앓아누웠다. 한참 야식을 먹지 않다가, 그날따라 유독 어묵탕에 소주가 간절해 예정에도 없는 술판을 벌인 것이 화근이었다. 새벽 4시쯤 설사를 하기 시작해 당일 오전 10시까지 설사와 구토를 합해 10차례 넘게 속을 게워냈다. 나중엔 어느 쪽으로든 물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겨우 삼킨 것이라고는 물뿐이었으니까.

다행히 그날이 토요일이라 오전 중에 내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20분 넘게, 거의 기어가다시피 해서 도착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사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주사와 약을 처방해주었다. 한두 끼 정도는 거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일단 점심까지는 거르고 저녁부터 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 근처 가게에서 야채죽을 테이크아웃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멀고도 멀었던 귀갓길에 새삼스럽게도 ‘병에는 장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시는 어묵탕에 소주를 먹나 봐라, 씩씩대면서. (물론 나는 또 어묵탕에 소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픽사베이

죽도 비릴 땐, 숭늉을

하지만 결국 그날 단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기껏 사온 야채죽조차도 비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한 번 죽에게 당하고 나니, 미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뭘 먹긴 해야겠는데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밤새 이온 음료를 마시고, 다시 게워내면서 응급실을 가야 하나 어쩌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친구에게서 숭늉을 먹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들었다.

숭늉.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숭늉을 상상하는 동안은 역하지도 않고 오히려 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급한 대로 마트에 가서 끓여 먹을 수 있는 누룽지를 사왔다. 적혀 있는 조리 시간보다 더 오래 팔팔 끓인 숭늉을 한 숟갈 떠먹는 순간, 쓰리던 속이 편안해졌다. 이온 음료 향과 구토 냄새로 썩어 들어가는 것 같던 입안도 개운해지고, 텅텅 빈 위 속으로 다정하고도 뜨끈한 숭늉이 들어가 든든함도 느껴졌다. 돌솥밥의 숭늉만큼은 아니더라도 누룽지 특유의 담백하고 구수한 향도 좋았다. 뜨거운 밑바닥의 고난을 오래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구수한 향이랄까. 아무튼 숭늉을 먹기 시작한 후로 3일 차, 4일 차에 걸쳐 병세는 급격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주사나 약보다도 숭늉의 도움이 더 컸다는 체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역사적인 음료

누룽지를 물에 끓인 숭늉은 예로부터 각종 차(茶) 문화가 발달된 일본과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고유한 음식이었다. 가마솥에 밥을 지었던 덕분에 가족들이 먹을 밥을 긁어 담은 후에는 항상 누룽지가 눌러 붙어 있었다. 설거지를 위해서라도 누룽지를 불리고 떼어내기 위해 물을 부었을 터. 그런데 누룽지를 끓인 물인 숭늉의 맛은 또 어찌나 기가 막히는지, 그냥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12세기 초,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 에서는 고려 사람들이 숭늉을 가지고 다니며 마신다고 신기해하는 내용이 있다. “고려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물그릇은 위가 뾰족하며 바닥이 평평한데 그릇 속에는 숭늉을 담는다. 나라의 관리나 귀족들은 언제나 시중드는 자를 시켜 숭늉 그릇을 들고 따라다니게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다. 테이크아웃 숭늉이라니. 요즘의 캐러멜 마끼야또나 아인슈페너처럼, 그 시대의 가장 힙한 음료였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장염을 앓았던 내가 톡톡히 본 숭늉의 효과도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동의보감』에서는 누룽지를 ‘취건반(炊乾飯)’이라고 명하며, “음식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못하거나 넘어가도 위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이내 토하는 병증으로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는 병은 누룽지로 치료한다. 여러 해가 된 누룽지를 강물에 달여서 아무 때나 마신다.”고 밝히고 있다. 숭늉은 차(茶)를 대신하는 음료, 식후 디저트, 아이들의 간식뿐만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숭늉도 테이크아웃 할 수 있을 때가 되지 않았나싶다. 미숫가루를 모티브로 하는 각종 곡물라테가 대중화되고, 라면국물 맛 티백도 나오는 마당에 숭늉이라고 안 될 것이 뭐람.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난 후에 칼로리 걱정 없이 개운한 숭늉 한 잔. 속이 더부룩하고 체기가 있을 때 소화제보다 먼저 뜨끈한 숭늉 한 잔. 물론 가격은 비싸지 않았으면 하지만.  [오피니언타임스=김경빈]  

 김경빈

 글로 밥 벌어먹는 서른. 라디오 작가 겸 칼럼니스트, 시집 <다시, 다 詩>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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