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시기별 왕릉에서 나타나는 십이지신상의 변화

[논객칼럼=김희태] 우리 역사의 각 왕조별 왕릉에 대한 답사를 다녀보면 특징적으로 등장하는 것 중 십이지신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십이지신상은 열두 동물을 형상화 한 것인데, 문화재 가운데 이 같은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신라왕릉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37곳의 신라왕릉 가운데 십이지신상이 확인된 사례는 성덕왕릉, 경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진덕여왕릉 등으로, 이 밖에 왕릉은 아니지만 김유신 묘와 구정동 방형분 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신라왕릉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을 보면 몸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얼굴 부분은 동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왕릉을 지키는 역할과 함께 당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십이지신상이 최초로 세워진 성덕왕릉, 사진 속 십이지신상은 ‘닭(=酉)’이다. Ⓒ김희태

원성왕릉의 십이지신상, ‘말(=午)’이다. Ⓒ김희태
흥덕왕릉의 십이지신상, ‘뱀(=巳)’이다. Ⓒ김희태
경주 傳 민애왕릉에서 출토된 납석제 십이지신상 Ⓒ김희태

한편 흥덕왕릉을 마지막으로 십이지신상이 새겨지지 않았는데, 이는 신라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다. 흥덕왕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둘러싼 내분은 극에 달했고, 자연스럽게 신라의 국력은 점차 쇠퇴했던 것이다. 따라서 왕릉의 외형이 전성기에 비해 초라하고, 규모가 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십이지신상은 고분의 내부에서 확인이 되는데, 인형 형태의 십이지신상이 출토되는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傳 민애왕릉에서 출토된 납석제(蠟石製, 납석이라는 광물로 만들었다는 의미) 십이지신상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제 십이지신상이 있다. 또한 김유신 묘의 경우 왕릉의 외형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것과 별개로, 납석제 십이지신상이 고분의 내부에 묻은 사례가 확인된 바 있다. 

■ 무령왕릉의 지석에 새겨진 십이지, '방향'의 성격을 보여준다. 

신라왕릉과 달리 백제의 왕릉급 고분에서 십이지신상이 확인된 사례는 무령왕릉이 유일한데, 이곳에서 출토된 무령왕의 지석 뒷면에 ‘십이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보통 십이지를 이야기할 때 ‘간지(干支)’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의 조합이다. 이를 통해 연도표시나 시간, 방향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령왕의 지석에 등장하는 십이지, 즉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경우 방향을 알려주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볼 때 앞선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과는 성격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무령왕비의 지석, 최초 서쪽에서 삼년상을 치룬 뒤 대묘로 옮겼음을 말해주고 있다. Ⓒ김희태
지석을 토대로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정지산 유적 Ⓒ김희태

실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은 무령왕비의 ‘빈전(殯殿)’이 설치되었음을 보여준다. 무령왕비 지석의 앞면을 보면 최초 서쪽(=유지,酉地)에서 삼년상을 지낸 뒤 무령왕이 있는 대묘로 옮겼다고 적고 있다. 또한 지석 뒷면의 ‘매지권’에서는 남서쪽(=신지,申地)의 토지를 매입했다고 적고 있는데, 대묘(大墓), 즉 왕릉을 조성한 땅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견해를 따를 경우 공산성을 중심으로 서쪽인 정지산 유적에 무령왕비의 빈전이 설치되었고, 남서쪽인 현 무령왕릉이 대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무령왕의 지석 뒷면에 등장하는 십이지는 방향을 알려주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 고려와 조선왕릉에서 나타나는 십이지신상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서는 십이지신상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우선 고려왕릉에서 십이지신상이 확인된 사례는 공민왕의 ‘현릉(玄陵)’이다. 여기서 유심히 봐야할 점은 현릉의 내부 벽화에 문관이 그려져 있는데, 관모 위로 열두 동물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를 ‘수관인신(獸冠人身)’이라 하는데, 쉽게 설명해 동물을 의인화한 것이다. 하지만 형태의 차이는 명확한데 앞선 신라왕릉의 경우 사람이긴 했어도, 머리 자체는 동물의 형상인 반면 고려왕릉과 조선왕릉에서 나타나는 ‘수관인신(獸冠人身)’의 경우 사람의 형태에 관모 위에 동물만 형상화 된 모습이다. 또한 내부에서 십이지신상이 확인된 사례는 앞선 傳 민애왕릉과 경주 용강동 고분의 사례와 유사하다. 이는 국력의 변화에 따라 외형에 있던 십이지신상이 내부로 부장되는 형태로 변화했지만, 십이지신상의 성격 자체는 왕릉을 지키는 역할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건원릉(健元陵)’의 병풍석, 공민왕의 현릉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지점이다. Ⓒ김희태
건원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정릉(貞陵)’의 병풍석, 지금은 청계천 광통교에서 볼 수 있다. Ⓒ김희태
인조의 ‘효릉(孝陵)’, 병풍석을 보면 구름 문양의 와운문과 의인화 된 수관인신을 확인할 수 있다. Ⓒ김희태

한편 공민왕의 현릉에서 나타난 십이지신상의 형태는 이후 조선왕릉으로 계승된다. 그런데 ‘현릉(玄陵)’의 경우 무덤의 내부의 벽화에 십이지신상이 그려졌다면 조선왕릉의 경우 봉분의 외형인 병풍석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병풍석에는 공통적으로 구름 문양의 ‘와운문(渦雲文)’과 함께 의인화 된 ‘수관인신(獸冠人身)’, 그리고 관모 위로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조선왕릉은 문종의 ‘현릉(顯陵)’과 선조의 ‘목릉(穆陵)’으로, 관모 위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성행하다 인조의 장릉부터 모란과 연꽃무늬로 바뀌게 되면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다. 또한 후기로 갈수록 병풍석이 만들어지는 사례가 많지 않고, 난간석에 십이지를 새긴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문종의 ‘현릉(顯陵)’, 병풍석을 자세히 보면 관모 위로 '소(=丑)'가 새겨져 있다. Ⓒ김희태
선조의 ‘목릉(穆陵)’, 관모 위로 '토끼(=卯)'가 새겨져 있다. Ⓒ김희태
인조의 ‘장릉(長陵)’, 이때를 기점으로 병풍석에는 모란과 연꽃무늬가 새겨진다. Ⓒ김희태
정조의 ‘건릉(健陵)’, 난간석에 십이지(=子)가 새겨져 있다. Ⓒ김희태

이처럼 십이지신상의 변화 과정을 통해 “신라왕릉-고려왕릉-조선왕릉”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왕조별로 십이지신상 형태의 차이가 있고, 성격 역시 완벽하게 같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가령 신라의 경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불교에서 십이지신상은 지켜주는 신이기 때문에 왕릉에서 확인되는 십이지신상의 형태는 하나 같이 무인 복장과 무기를 들고 있다. 반면 고려나 조선왕릉의 경우 십이지신상이 의인화 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무관이 아닌 문관의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왕릉에 남겨진 십이지신상의 변화 과정을 통해 왕릉의 계승과 당시의 시대상 및 국력의 변화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서 바라볼 지점이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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