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14]

[논객칼럼=최하늘] “은퇴하고 실컷 놀아봐라.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걸….” 은퇴를 앞두고 있던 나에게 고교동창이 해 준 말이었다. 그는 평생 다니던 연구소를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쉬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한가로운 삶의 함정에 대한 경고였다. 한가로운 세계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평안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던 나의 공언은 번복될 수밖에 없었다. 은퇴 1년 만에 일어난 변화다. 일이 없이 삶의 질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다시 일을 찾아야 했다.

일의 목적은 바뀌어 있었다. 인생후반기 나의 일은 성공이나 돈이 아닌 의미와 가치에 초점 맞춰졌다. 전반기의 연장전이 돼서는 안 된다.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막막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실마리가 쉽게 잡히질 않는다. 그러다 만난 게 서울시가 50+세대(만50~64세)의 인생재설계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들이었다.

Ⓒ최하늘

작년 봄. 부활절을 앞두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온누리교회 은퇴자 프로그램 ‘은빛날개’에 참석했다. 거기서 강사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를 불광동에 있는 50+서부캠퍼스로 초대했다. 가보니 그는 50+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팸플릿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준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팸플릿에 나와 있는 50+캠퍼스의 교육 프로그램 중에 ‘진로탐색’과 ‘앙코르커리어 특강’을 수강했다. 짙은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시야가 트여간다. 방향이 잡혔다. “그렇다. 이제 나는 앙코르커리어를 하는 것이다.”

앙코르커리어(encore career)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들고 다시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그 일을 통해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고, 사회에 공헌하면서, 적당한 경제적 보상도 받는다. 내가 원하는 3박자를 다 갖춘 일의 개념이었다. 인생2막의 일로 이보다 좋은 것은 없어 보였다.

때 마침 서부캠퍼스에서 50+SE펠로우십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서울시가 앙코르커리어를 희망하는 50+세대와 그들의 전문성과 역량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기업을 이어주기 위해 마련한, 사회공헌형 일자리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간단히 말해 사회적 기업에서 한시적으로 일 할 시니어 인턴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영화 ‘인턴’속 70세 시니어 인턴 로버트 드니로가 생각났다.

그렇게 해서 내가 운명처럼 만난 곳이 법률 IT기업 로앤컴퍼니(Law&Company)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LawTalk)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법률적 도움을 주는 소셜 벤처로 나와 있다. 회사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와 사업 모델이 마음에 와 닿는다. 35년 만에 피면접자의 자리에 섰다. 서류전형과 1차 면접을 통해 참가자로 선발된 뒤에도 계속되는 교육과 심층면접, 현장면접…. 조금은 지루한 과정들이 이어진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것은 사회적기업(SE)과 펠로우(fellow) 사이에 최적의 매칭(matching)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회사가 30년 남짓 언론에서 일선 기자와 경영자로 일한 나를 펠로우로 지목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회사가 도약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사업으로 로톡뉴스(LawTalk news)라는 인터넷신문 창간을 준비 중이었다. 일주일에 이틀 출근하기로 했다. 내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최하늘

멍석은 깔렸다. 나는 이제 그 위에서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다. 열 댓 명되는 임직원 거의 모두가 20~30대다. 수평적 조직 또한 생소하다. 이들에게는 소셜 벤처가 갖는 특유의 기질도 더해져 있다고 했다. 35년간 전혀 다른 조직문화 속에서 지내온 내가 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으려나?

길은 하나다. 완전히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수없이 되뇐다. “I’m nothing!” 하나 더 다짐한다. “절대로 청바지 입은 꼰대는 되지 말자!” 그러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출근 전날 아내도 내게 조언했다. 말을 아끼라고. 대신 공감하고 경청하라고.

청바지와 맨투맨 티셔츠 차림에 백 팩을 메고 교대역 근처에 있는 회사에 출근했다. 아담한 건물의 두 개 층을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 중 한 층은 모던하게 인테리어 해 놓은 카페 같다. 이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유롭고 스마트한 캐릭터를 짐작케 한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들과 일치해서 신기하다.

Ⓒ최하늘

명함에 적혀 있는 직책은 ‘고문’이었고, 그들은 나를 ‘회봉님’이라고 불렀다. 경영진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나는 얘기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절대 먼저 나서 업무에 대해 의견을 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나의 의견을 구하는 일이 있다면, 성심껏 내 경험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자칫 나의 경험이 젊은 두뇌들의 창의성을 저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신문 만드는 것을 돕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 반평생 해온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일하는 게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궁합이 맞기란 쉽지 않다. 50+관계자들은 ‘최고의 매칭’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업을 섭외하고, 그곳 업무에 적합한 펠로우를 찾아 연결시킨 코디네이터의 뛰어난 기량 덕분이었다.

한 주에 한 번, 전 임직원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하는 회의 시간이 있다. 그 방식이 새롭다. 돌아가면서 자신의 현재 컨디션에 점수를 매긴다. 나는 10점 만점에 9.0이나 9.5를 얘기한다. 무엇보다도 이곳 일터에서의 생활이 행복하고 감사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퇴근길에는 늘 내 입에서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퇴근길에 후회와 자책이 많았던 전반기와 크게 대조를 이룬다.

Ⓒ최하늘

“경험은 결코 늙지 않는다. 경험은 절대 시대에 뒤지는 게 아니다.
(Experience never gets old. Experience never gets out of fashion.)” 영화 ‘인턴’에 나오는 이 대사가 20~30대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나를 격려한다. “이것은 신세계다!” 어느새 영화 속 로버트 드니로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SE펠로우십 계약기간 5개월이 끝났다. 펠로우 40명 중 절반가량이 ‘시니어 인턴’으로 전환돼, 같은 곳 근무를 3개월 연장했다. 프로그램 운영 주체도 50+재단에서 사회적기업인 ‘신나는 조합’으로 바뀌었다. 재 선발 면접을 했다. 정작 시험을 치르는 나보다 회사가 더 긴장하는 눈치다. 면접 하루 전날, 경영진이 내게 말한다. “회사가 회봉님을 정말 필요로 한다고 말하세요. 여의치 않으면 회사에서 민원을 제기할 것이라고 해주세요”

면접관들은 “면접날 너무 행복했다”고 털어놓는다.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한국판 앙코르커리어’ 시험 무대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데 따른 기쁨이 컸을 것이다. 면접을 보는 펠로우들이 느끼는 행복과 보람이 이들이게 고스란히 전이됐기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최하늘

펠로우십은 플러스 섬(plus sum) 게임이었다. 기업과 참가자, 그리고 사업 주최자 모두가 위너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나의 시니어 인턴십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있었다. 도합 8개월의 시니어 인턴 기간이 종료되고, 회사대표와 나는 고용계약서에 서명했다. 나의 앙코르커리어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확히 1년간의 여정이었다. ‘네가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이 내고, 사막에 강을 만들 것이니…’ (사43:19)

나는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섰고, 거대한 여리고성을 마주한다. 새로운 이닝이 시작된 것이다. 더욱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 예고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해 나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지난 8개월 나를 이끄신 그 분의 명령이기도 했다.

“너는 외치지 말고, 네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라.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수6:10)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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