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논객칼럼=임종건] 고려조부터 조선조를 거쳐 현재도 제한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관리임용 제도의 하나가 상피(相避)제도다. 친인척이 같은 관청에서 근무하지 못하게 하고, 친척이나 지인이 많은 곳에는 벼슬을 내리지 않는 제도이다.

지역과 지역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나, 정실에 이끌려 잘못된 판단을 내릴 위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비슷한 것으로 관리를 지방으로 보낼 때 고향이 아닌 곳으로 보내는 향피(鄕避)제도도 있다.

이와 대조되는 개념이 현재도 법원에서 부분적으로 시행하는 향판(鄕判)이다. 원래는 서울판사(京判)에 대칭되는 이름으로, 지방법원 근무를 원하는 판사를 일컫는다. 향판 중에는 고향을 임지로 삼는 경우가 많아, 향판에서의 ‘향’은 ‘시골’과 ‘고향’을 동시에 의미한다.

향판제도에는 순기능도 많지만, 일반에 알려지는 것은 주로 지방의 토호들과 결탁하여 불공정한 판결을 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그 같은 부작용으로 인해 향판제도는 판사사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향이라고 한다.

관리의 입장에서는 임지가 고향인 것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의미도 있으므로 자원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향과, 지인이 많은 곳이 관직생활에서 반드시 좋은 것만이 아닌 것은 법집행의 공정성에 의심을 사기 쉽기 때문이다.

지금 광주지법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을 보며 상피를 생각하게 된다. 39년 전 광주 5·18 사태의 장본인인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헬기에서 기총소사하는 것을 봤다는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광주는 전 씨에 관한한 적대와 증오가 남아있는 곳이고, 전 씨에게는 두려움이 있는 원죄의 땅이다. 그가 퇴임 이후 30년 넘게 한 번도 광주에 가지 못한 것이나, 그가 고령과 신병을 이유로 법원에 재판 관할지를 광주에서 자신의 거주지인 서울로 옮겨달라고 거듭 요청하고 있는 것도 속내는 그런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광주는 그에게 역상피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관할지 변경신청은 법원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래서 그는 지난달 서울에서 광주로 승용차를 타고 재판을 받으러갔다. 가는 도중 취재차량의 근접취재를 피해 휴게소 화장실에서 쫓기듯 나오는 장면도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 검찰청사로 수사를 받으러 오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 버스를 헬기까지 동원해 취재하던 모습이 연상됐다.

광주 시민들은 그가 5·18의 현장에서 단죄되는 것의 역사성을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는 한풀이의 속시원함도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5·18의 심판은 엄중한 것이다. 재판 장소가 다르다고 진실이 달라질 사건이 아니다. 굳이 광주에서 재판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상피제도에서 말하는 필요 이상의 오해의 소지는 없는 것일까?

재판이 열리던 날 광주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광주의 교육책임자는 이를 두고 “광주 어린이들의 투철한 정의감” 운운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지역정서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재판과정에서 전 씨의 건강문제에 대해 치매라고 할 만한 특징적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심문도중 졸거나 엉뚱한 발언을 하는 등 정상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전 씨가 기자들에게 “이거 왜 이래”라고 말 한 것을 두고 정상인의 막말인지 치매환자의 헛소리인지 해석이 갈렸다.

그가 고령이고, 그의 치매 증상은 의사가 내린 진단이고, 그의 거주지가 서울이고, 무엇보다 재판장소 변경으로 진실이 달라질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피의자 인권차원에서라도 재판 관할지변경문제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광주시민들이 먼저 필요 이상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전 씨 재판을 광주가 아닌 곳에서 열기를 바란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럴 가망성이 없기 때문에 법원도 별다른 고민 없이 재판관할지변경신청을 거부한 것이라면 ‘지역정서를 너무 잘 아는’ 이 시대의 향판이 따로 없겠다.

전 씨의 재판으로 지금 생존 전직 대통령 4인 중 3인이 동시에 재판을 받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며 환호하는 세력도 있지만 국가적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전 씨의 재판은 ‘로드쇼(Road Show)’까지 연출하고 있다. 그런 로드쇼는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다.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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