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논객칼럼=신세미] 국립현대미술관의 2013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공성훈 화가의 ‘흰 머리’ 그림. 가로 181.8cm 세로 227.3cm의 캔버스에는 폭풍 전야 같은 거칠고 검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누군가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세로로 긴 화면 하단으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섬세하게 묘사된 그림에서 주인공의 얼굴은 물론 성별조차 불분명하다. 다만 희끗희끗한 머리에서 나이 지긋한 인물이려니 짐작할 뿐이다.

‘흰 머리’ 그림은 혹 작가의 삶이 투영된 자화상은 아닐까. 작가는 흰 머리의 인물을 통해 지난 세월의 고난한 삶, 그리고 녹록지 않을 미래의 불확실성을 일깨우는 것은 아닌지. 문득 그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그림에서 ‘나’와 만났다. 온통 검거나 노란 머리도 아니고 반백머리가 내 뒤통수처럼 여겨졌다.

공성훈, 흰머리, 2013, 캔버스에 유채 Ⓒ공성훈 작가 제공

근래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마다 흰 머리 이야기를 건넨다. 정면으로 보이는 이마 주변에 흰 머리가 부쩍 늘어난 내게 지인들은 “염색 하면 열 살은 더 젊게 보인다”고 염색을 권한다. 그 조언은 부드러운 권유라기보다 같이 늙어가는 또래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한 여성 장관의 자연스러운 은발을 지목하며 “요즘 흰 머리가 대세인 거 아니냐”고 화제를 돌려보지만 반응은 싸하다.

나이 듦은 머리카락에서부터 본격화하는 것같다. 중 장년 모임에선 숱이 현저히 줄어들고 머리가 희어졌다는 푸념 끝에 가발 염색 이야기가 이어진다. 잦은 염색으로 머리카락이 손상되고 눈 건강이 걱정된다면서 효율적인 염색 정보를 주고받는다. 누군가는 흰 머리라도 좋으니 숱이라도 많으면 좋겠다며 탈모 걱정을 호소한다. 주변의 또래 중 남녀 통틀어 염색을 한 이가 하지 않은 이보다 더 많은 듯 보인다.

며칠 전 팔십 중반의 친정어머니도 결국 머리 염색을 다시 하신 걸 봐도 ‘흰 머리’는 노년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체 변화인 것 같다. 평소 머리 손질을 잘 하시는 어머니는 거듭된 파마와 염색 때문인지 두피가 아프고 탈모가 심해졌다며 한동안 염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백발에 머리 속이 훵 하니 추레하고 더 나이 들어 보인다며 미장원을 다녀오셨다.

추억의 한국 영화 제목으로도 친숙한 ‘로맨스 그레이’는 낭만적인 노년을 뜻한다지만 현실에서 ‘그레이 헤어’  ‘은발’  ‘하얀 머리’는 꺼려지고 싫어하는 변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노화 현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 자신은 머리 염색에 관심이 없다. 두피 쪽에 흰 머리가 드러나기 전 2,3주마다 정기적으로 염색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하다. 게다가 시각적으로 ‘더 젊게’ 에 대한 욕구가 절실하지 않은 편이다.

무엇보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젊은 동료들 사이에서 튀는 흰 머리를 감춰야 할 상황도 아니다. 일상에서 흰 머리의 불편함, 불리함을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탓에 “흰 머리가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는 인사말을 오히려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해외 유명오케스트라 공연 때 보면 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단원들이 적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앳된 얼굴의 젊은 연주자들이 대부분인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외양에서부터 연륜이 느껴지면서 그들의 연주조차 더 풍요롭고 원숙하게 느껴졌다. 영국 법정에서 판사들이 쓰는 흰 머리 가발이, 흰 머리를 권위와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온 전통의 상징이라고 하던데….

얼마 전 흰 머리와 관련해 흥미로운 외신을 접했다. 지난 3월 초 올해 66세의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전국인민대표대회 등에서 흰 머리를 노출했다는 뉴스였다. 중국 지도부는 그 동안 나이보다 젊게 보이도록 머리를 새까맣게 염색했으나 시 주석이 이례적으로 흰 머리를 드러냈다는 기사에 서민적 이미지의 부각, 자신감의 표출이라는 분석 및 평가가 더해지는 등 흰 머리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읽어낼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검은 머리가 흰 머리로 변하는 모습을 밤 하늘의 별에 비유한 ‘백발’ 시에서 마음의 노화야말로 더 힘들고 아픈 일임을 일깨운다.

‘백발이 초저녁 별 돋듯
처음엔 하나만 반짝이다가
금세 별 둘 별 셋이 되고
별 셋 뒤엔 뭇 별이 다퉈 나와서
깜빡깜빡 반짝반짝 어지럽게 빛나
헤아릴 틈도 없이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그득해지네
(중략).
백발을 다시 검게 만들 수 있다 해도
메마른 이 마음 다시 꽃피우긴 어려우리’.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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