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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왕 즉위, 한일관계 새 시대로 이어지길[유세진의 지구촌 뒤안길]
유세진 | 승인 2019.05.02 10:10

[논객칼럼=유세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지난달 30일 왕위에서 물러나고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1일 126대 새 일왕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1989년 1월 시작된 일본의 헤이세이(平成) 시대는 30년 3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레이와(令和) 시대가 개막했다. 일왕은 일본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지금 사실상 최악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과 관련한 한국 법원의 판결, 일본 초계기에 대한 레이더 조사(照射) 등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으로 양국 관계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꼬여 있다. 일왕 교체가 악화된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좋은 계기가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픽사베이

한일 관계 악화의 중심에는 일본 보수 우경화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가 있다. 물러난 아키히토 전 일왕은 분쟁 해결을 위해 전쟁하는 것을 금지한 평화헌법 개정을 내세우며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주장해온 아베 전 총리를 그나마 견제해왔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11살 때 아버지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및 패전 선언 방송을 듣고 전쟁의 참혹함을 느꼈던 아키히토 전 일왕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의 그림자를 지우는 것은 평생의 과제였다. 아키히토가 일왕으로 있었던 것은 30년이 조금 넘었다. 그는 그러나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전쟁을 일으켰던 아버지를 대리해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아니라 평화의 중재자이자 전도사라는 이미지를 일본에 덧씌우는 일을 해 왔다. 그런 만큼 아키히토 전 일왕은 평화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 아키히토가 고령과 건강 상의 이유를 내세워 일왕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일왕이 살아 있으면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202년만에 처음이다. 또 일본 현대사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고 왕위를 끝내는 것도 아키히토가 처음이다. 아키히토가 일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 전쟁의 그림자를 지워낸다는 자신의 과제를 다 해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뒤를 잇는 아들 나루히토 새 일왕에게 자신에게 주어졌던 과제를 대물림하는 것일까?

이제는 물러난 아키히토의 속마음까지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44년에 걸친 왕세자로서의 세월과 30여년에 걸친 일왕으로서의 재위 기간동안 일본은 과거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국제 무대에서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다. 30일 퇴위식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 국민들을 대표해 아키히토 전 일왕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키히토 역시 "상징으로서의 나를 받아준 국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 등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하는 발언을 되풀이했었다. 따라서 그의 마지막 발언에 과거사에 대한 언급이 또 포함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아키히토는 그러나 말을 아꼈다. 그는 "레이와 시대의 평화와, 일본과 세계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고만 말했다.

아키히토 전 일왕을 이어 새 일왕에 오른 나루히토는 1일 즉위식에서 "상왕의 행보를 깊이 생각해, 항상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에게 다가서면서 헌법에 따라 일본 및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다 할 것을 다짐한다.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일왕으로서의 첫마디를 뗐다. 자신의 가치관을 엿보게 할 이 같은 첫 즉위 소감은 아버지의 평화 행보를 이어갈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그러나 평화헌법에 대한 구체적 수호 의지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키히토 전 일왕은 첫 즉위 소감에서 "헌법을 지키겠다"고 밝혔었다.

1960년생으로 전쟁을 겪지 않은 나루히토 새 일왕은 아버지와는 달리 전쟁에 대한 부담 없이 일왕으로서의 행보를 걸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해외에서 유학한 첫 일왕이다. 게다가 폐쇄됐던 일본 왕궁을 국민들에게 개방한 그의 부모 아키히토와 미치코(美智子) 전 일왕 부부는 아들 나루히토에게 전통을 거부하는 교육을 시켰다. 나루히토와 함께 영국 옥스포드에서 수학했던 미국의 케이스 조지는 나루히토에 대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지만 일본 왕위 계승자로서의 의무를 잊은 적도 없고,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지는 또 "나루히토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들을 바라본다"라고 덧붙였다. 비올라 연주자이기도 한 나루히토 새 일왕은 비올라라는 악기를 선택한 것에 대해 "비올라는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신"으로 불리면서 일본 침략전쟁의 첨병이었던 할아버지 히로히토 전 일왕이나, 위령 여행과 큰 재해 때마다 피해 지역을 찾아 이재민들을 위안하며 국민들 곁으로 파고들었던 아버지 아키히토 전 일왕과 다른 길을 선택할 나루히토 일왕의 행보는 어떤 것이 될 것인가? 나루히토는 지난 2월 23일 생일을 맞아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버지 아키히토의 행적이 자신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지만 자신은 시대에 맞는 새 역할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베 총리의 개헌 야욕을 막아내는 역할을 할 것인지, 그의 선택에 따라 한일 관계의 앞날도 달라질 것이다. 새 일본 국왕의 선택이 한일 양국의 어두운 과거 상처를 치유하고 밝은 미래로 함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유세진

 뉴시스 국제뉴스 담당 전문위원

 전 세계일보 해외논단 객원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독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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