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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만의 수학여행[최하늘의 하프타임 단상 15]
최하늘 | 승인 2019.05.03 08:30

[논객칼럼=최하늘]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가 숨 쉬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감사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그 중 하나다. 세월이 안겨준 선물이다. 이순(耳順)이 되면서부터 그랬다. 날이 갈수록 그 마음이 더해 간다.

이것은 요즘 말하는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또 다르다. 세월이 낳은 여유가 보태졌기 때문일 것이다. 2019년 4월 19~20일, 용산고등학교 26회 동기생들과 함께 한 ‘46년 만의 수학여행’은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

Ⓒ최하늘

알람 소리에 깨어 먼저 날씨를 확인한다. 전국이 맑고 낮 최고 기온이 20도 안팎이다. 어제는 종일 찌뿌둥한 날씨에 작은 빗방울까지 보였는데, 다행이다. 아내와 함께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교대역 14번 출구라고 했다. 차에 오르기 전에 먼저 들려야 할 곳을 찾는다. 손을 씻는데 등 뒤에서 콧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지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보다. 흘끗 보니 배낭을 멘 아저씨의 뒷모습이 비친다.

밖으로 나와 아내를 기다리는 데 흥얼거리는 소리가 뒤따라온다. 얼굴이 낯익다. 고등학교 때 한 반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되는 L 군이다. 그에게서 그 옛날 수학여행 때의 설렘이 전해져 온다.

Ⓒ최하늘

10대 후반의 까까머리들이 어느덧 60대 중반이 됐다. 거의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그동안에도 크고 작은 동기 모임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번처럼 많은 인원이 1박 2일로 여행하기는 처음이다. 동기생 59명과 그들의 배우자 20명이 모였다.

3대의 고급 리무진 버스에 나누어 몸을 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가는 곳은 충남 서산과 태안 일대라고 했다. 차 안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46년 만의 수학여행’이라는 생소한 타이틀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서울을 떠난 버스가 죽전 정류장에 멈춰 섰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10분쯤 지나자 한 친구가 헐레벌떡 차에 오른다. 그리고 하는 첫 마디가 “아이 ×× 쪽팔려~” 우리의 유쾌한 S 군이다. 차 안에 유쾌함이 더해진다.

Ⓒ최하늘

서산 가는 길은 봄 향기가 가득했다. 서울에서는 이미 지기 시작한 왕벚꽃이 이곳에서는 절정이다. 한우농장 구릉에 펼쳐진 풀밭과 아름다운 호수가 이국적이다. 기대를 넘어선다. 충청도에 이런 멋진 곳이 있었는데, 그동안 모르고 살았구나…. 산길을 줄지어 오르니 개심사라는 오래된 사찰이 나온다. 건축사인 C 군의 해박한 설명이 더 해지니 제법 수학여행 분위기다.

나로서는 처음인 해미읍성의 전경도 이채롭다. 이어지는 태안 수선화 축제, 백사장항과 대하랑꽃게랑 해안인도교 관광 등 잘 짜인 일정에서 여행을 기획하고 준비한 집행부의 노고가 묻어난다. 맛있는 음식 또한 감사하다.

황도 해변 언덕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펜션, 그리고 달빛과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그곳의 밤은 내 삶에 또 하나의 추억을 쌓는다. 안면도 휴양림과 삼봉해변을 거닐며 보낸 둘째 날은 여행자의 마음에 우정과 평안을 선물하고 있었다.

Ⓒ최하늘

돌아오는 차 안에서 친구들은 잠시 ‘46년 전 수학여행’을 회상한다. 진주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서 거북선을 배경으로 사진 찍은 것을 기억한다. LSD라고 불리는 커다란 해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다음 날은 경주 구경을 했는데, 무엇을 타고 그곳에 갔는지를 두고 설왕설래다.

이제 ‘46년 만의 수학여행’을 다녀와 새삼스럽게 수학여행(修學旅行)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닦고 배우는 여행’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닦고 배웠나.

315명이 가입해 있는 고등학교 동기 단체 카톡방에 ‘수학여행’ 얘기가 처음 올라왔을 때 나는 “타이틀이 재미있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생각하니, 이것이 내게는 진짜 수학여행이었다.

이번 수학여행에서 내가 본 것은 섬김과 배려의 아름다움이었다. 많은 좋을 것들을 봤지만, 특별히 이 두 가지가 뇌리에 깊숙이 파고든다. 그것들은 지금부터라도 내가 ‘수학(修學)’해야 할 덕목이다.

이 여행은 동기회 임원진을 포함한 열 명 이상 친구들의 헌신적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가 없이 누군가를 그렇게 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회장단은 19대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많은 동기들이 그동안 그렇게 헌신해 왔다는 얘기였다.

또한 H 군에게서 배운다. 자칭 글로벌 엔터테이너다. 재치와 유머가 남다르다. 언제 봐도 그는 최고의 사회자다. 여행을 통해 그런 그의 진면목을 본다. 그것은 배려였다. 그에게 감춰진 배려심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나눠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최하늘

수학여행을 통해 또 하나 느낀 게 있다면, 그것은 인생 2막에 새로 쓰는 ‘공동체’의 의미다. 인생의 시즌이 바뀌면 나와 함께 할 공동체들도 바뀌는 게 이치다. ‘이익’ 보다 ‘공감’이 더 가치를 갖는 때가 된 것이다. 같은 때를 살아온 동창들의 만남에는 그런 공감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이들이 나이 들면서 동창 모임을 찾는다. 그들의 모습에서 남대천 연어를 떠올린다. 알래스카의 넓은 바다를 헤엄쳤던 그들이, 이제 태어난 자리로 돌아와 그 품에서 안식한다.

46년 만의 수학여행이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그동안 받기만 하고 살았다. 나도 더 늦기 전에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섬김과 배려의 본을 보인 동기생들이 내 가슴에 새긴 수학여행의 흔적이다. 그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다. 험한 세상을 열심히 헤엄쳐온 친구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최하늘

 새로운 시즌에 새 세상을 봅니다. 다툼과 분주함이 뽑힌 자리에 쉼과 평화가 스며듭니다. 소망이 싹터 옵니다. 내가 죽으니 내가 다시 삽니다. 나의 하프타임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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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늘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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