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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기마병 ‘개마무사’[김부복의 고구려POWER 18]
김부복 | 승인 2019.05.10 10:56

[논객닷컴=김부복] 금나라 군사 17명이 달려가고 있었다. 이들을 송나라 군사들이 노렸다. 송나라 군사의 숫자는 자그마치 2000명이었다. 그 많은 군사가 고작 17명을 덮쳤으니 결과는 뻔했을 것 같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금나라 군사는 모두 말을 탄 기마병이었다. 그들은 즉시 전투대형으로 바꿨다.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가운데 7기, 왼쪽과 오른쪽에 5기씩 배치해서 송나라 군사와 당당하게 맞섰다.

이 17명의 ‘미니부대’를 보병뿐인 송나라 군사들은 당할 수 없었다. 금나라의 기마병이 ‘활을 쏘며 적진을 교란하고, 종횡으로 말을 달렸기 때문’이다.

송나라 군사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산산이 붕괴되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많은 군사를 잃고 패주했다. 금나라 기병은 17명 모두가 건재했다. 단 한 명도 잃지 않았다. 기마병의 위력은 이처럼 막강했다.

Ⓒ픽사베이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말갈족이라고도 불렀다. 중국 사람들은 그 여진족을 두려워했다. 그중에서도 기마병을 무서워했다. “여진 기마병 혼자 중국 병사 1000명을 당할 수 있다”며 겁부터 먹었다. “여진 기마병 1만 명이 모이면 천하무적”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이 막강한 여진족을 통솔하고 다스렸던 나라가 고구려다.

고구려의 힘 역시 기마병이었다. 고구려는 아득한 시절부터 기마병을 양성했다. 지평선이 하늘과 붙어 있을 만큼 드넓은 만주벌판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기마병이 필수적이었다.

고구려는 동천왕 때인 246년 위나라 장군 관구검(毌丘儉)의 군사와 대적하면서 ‘철기 5000명’을 동원했다. 246년이면 3세기 중반이다. 그 당시에 이미 말과 기사 모두에게 ‘철제’ 갑옷 입힌 기병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갑옷은 쇳조각을 나란히 이어서 꿰맨 ‘찰갑(札甲)’이었다. 가볍기 때문에 행동이 자유로웠다. 말에게도 갑옷을 입히고, 투구도 씌웠다. 양쪽 눈구멍만 제외하고 투구를 씌웠고, 네 다리를 제외한 몸 전체에 갑옷을 입혔다. 말이 적의 화살에 맞아 쓰러질 경우, 기마병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뛰어난 제철기술 덕분에 가능했다. 고구려는 오늘날에도 제철공업 도시로 유명한 만주의 안산(鞍山)과 본계(本溪) 등지의 철광을 장악하고 있었다. 남으로는 황해도 지역의 철광도 확보하고 있었다.

중무장한 기마병의 모습은 고구려 벽화가 전해주고 있다. 갑옷 입힌 말을 ‘개마(鎧馬)’라고 했다. 벽화에는 ‘무덤 주인이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있는 모습(塚主着鎧馬之像)’이라고 적혀 있다.

이 ‘개마무사’를 중국 사람들은 ‘동방기구(東方騎寇)’라며 껄끄러워했다. ‘말을 타고 있는 동쪽의 도둑’이라는 뜻이다.

17명의 기마병이 2000명을 물리칠 정도였다면, 5000명의 기마병은 수십만 대군과 어렵지 않게 맞섰을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힘이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산성(山城)에 의지해서 싸우는 데 능숙하다고 했다. 그러나 순수한 기마병만으로 전투를 했다는 기록도 적지 않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그런 기록이 7군데나 있다.

인간이 육지에서 말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재간은 없었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의 속도도 ‘마속(馬速)’이었다. 말보다 빨리 이동한 것은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였다.

그랬으니, ‘말=군사력’이었다. ‘말=국력’이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고구려를 이었다는 고려 숙종 임금 때인 1104년 윤관(尹瓘)의 건의로 ‘별무반(別武班)’이 편성되었는데, 그 별무반 조직에 ‘신기군(神騎軍)’이 포함되고 있었다.

‘신기군’은 글자 그대로 말을 타는 기마병이다. ‘여진 정벌’을 실패한 이유를 분석한 결과, 기마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부랴부랴 ‘신기군’을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더 한심했다.

‘왜란’ 때였던 1592년 6월 15일 ‘수원전투’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 군사가 1만 명에 달했는데도, 왜군 기마병 ‘단 6기’에게 당하고 만 것이다.

“말 탄 왜병 여섯이 깃발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 나오자 1만이 넘는 우리 군사가 한꺼번에 무너져서 갑옷과 활을 버리고 달아났다. 버려진 군량, 활과 화살, 깃발과 북 등이 언덕을 이룰 만큼 널렸는데 그밖에 잃은 것은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2018년 7월 13일자 매일경제>

‘호란’ 때도 다르지 않았다.

인조 임금은 청나라의 ‘11개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삼전도 치욕’이다. 그 조건에 따라, ‘조선 임금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세자 일행이 혼하(渾河) 변의 야판(野板)에 이르자, 청나라 조정을 대표한 용골대(龍骨大) 등 120명이 강변 백사장에 차일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아닌 인근 왕후의 부인은 가마를 타고 다닐 수 없게끔 법도가 되어 있으니 말을 타고 성안에 들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우리 측에서 세자나 대군 부인이 평생 말을 타본 적이 없으니 예외로 해달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나라의 세자마저 말을 타는 방법조차 몰랐던 것이다. 고구려 때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에게 말 고르는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일반 장사꾼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로 병들고 수척하여 버리게 된 것을 고른 다음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조선 때에는 공주가 아닌 세자마저 말이라고는 타본 적도 없었다.

정조 임금 때 유득공(柳得恭·1748∼1807)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 나오는 글이다.

“…털이 붉은 말을 ‘절다(截多)’, 밤색 말을 ‘구랑(句郞)’, 붉은털과 흰털이 섞여난 홍사마를 ‘부루(夫婁)’라 하며, 검은 말을 ‘가라(加羅)’, 누런 말을 ‘공골’이라고 한다. 또 검은 갈기의 누런 말을 ‘고라(高羅)’, 털이 희고 갈기가 검은 해류마를 ‘가리온(加里溫)’이라 하며, 볼에 줄이 있는 말을 ‘간자(間者)’라고 한다.”

‘경도잡지’는 그러면서 덧붙이고 있다.

“이 이름은 본디 만주어인데, 사람들이 말시장(馬市場)에서 말을 사고 팔 때 만주어를 그대로 본떠서 쓰는 말이다.”

조선 후기의 말 이름은 모조리 ‘만주어’였던 것이다. 고구려 때 만주벌판을 달리던 그 많던 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후손들은 ‘만주어’를 빌려서 쓰고 있었다. ‘기마민족의 자존심’도 함께 잊고 있었다.

김부복  news34567@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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