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의 고전읽기]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

아, 무정(無情)

초등학교 4학년 때 표지가 떨어져 나간 두툼한 동화책 한 권을 며칠 동안 읽으면서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속표지에 새겨진 제목은 <아, 무정>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책의 제목이 <장발장>이라는 것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장 발장이었기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논란을 벌이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 원래 제목임을 알았으나 그 뜻을 정확히 아는 아이는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의 기억을 떠올려 ‘아, 무정(無情)’이라 일러주었고, 아이들은 내가 매우 박식하다며 다들 그렇게 알았다.

굳이 부기하자면 Misérables은 ‘비참한, 불쌍한, 불행한, 매우 가난한, 극빈의, 대단히 빈약한, 가치없는, 하찮은, 초라한’의 뜻이다. 만약 우리나라 작가가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했다면 독자들에게 외면 받았을 것이다.

Ⓒ교보문고

억압받은 인물의 표상 ‘죄수번호 24601’

아주 오래된 신문기사 하나를 읽어보자.

10일 民議院(민의원) 本會議(본회의)에서는 韓國(한국)의 一(일) 民間人(민간인)이 日本(일본) 裁判所(재판소)에 依(의)해서 不當(부당)하게 死刑(사형) 言渡(언도)를 받고 있는 事件(사건)을 外務分科委員會(외무분과위원회)로 하여금 照査(조사)케 할 것을 決定(결정)하였고, 그런데 이날 金00 議員(의원)이 報告(보고)한 바 --- 朴00이라는 韓國人(한국인)은 倭政時代(왜정시대)에 徵用(징용)으로 끌려가 北海道(북해도)에서 解放(해방)을 맞이한 후 長綺縣(장기현)에서 居住(거주)하였는데 그때 朴은 야마우라라는 日本人(일본인)이 經營(경영)하는 밭에서 ‘당근’ 하나를 뽑아먹은 事實(사실)이 있었는데 그후에 가서 야마우라가 被殺(피살)되자 日本(일본) 警察(경찰)에서는 朴씨를 拷問(고문)하여 그로 하여금 殺人强盜罪(살인강도죄)를 虛僞(허위)로 自白(자백)케 하였다.
- <동아일보> 1957년 8월 11일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박00이 남의 밭에서 당근 하나를 왜 뽑아 먹었는지도 알 수 없다. 몇 가지는 추정 가능하다. 징용으로 끌려갔다면 빈손이었을 것이고, 1945년 광복될 때까지 돈을 모았다 하여도 극히 적었을 것이며, 몹시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배가 고파 당근을 뽑아 먹었을 확률이 높다. 그 결과 살인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

매우 불공정하고 불편부당하고 부조리하다. 장 발장(Jean Valjean)은 이에 비하면 법의 엄격하고 정의로운 심판을 받았다 할 수 있다. 그는 명백히 빵을 훔쳤고, 툴롱(Toulon) 교도소에서 4번이나 탈옥을 시도하다가 붙잡혔기 때문이다. 19년의 옥살이는 그래서 억울한 사형 언도보다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수번호 24601의 장 발장은 모든 문학작품 속 주인공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억울하고 억압받은 인물의 표상이 되었다.

앙시앵레짐을 기요틴으로 사형시키다

세계 3대 혁명 중 하나인 프랑스 혁명은 그 과정이 몹시 길고,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많다. 1789년 7월혁명,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을 아우르지만 1789년의 혁명을 보통 ‘프랑스대혁명’이라 칭한다. 근대 이전에 프랑스는 선진국이 아니었다. 영국에 비해 산업적으로 뒤처지던 프랑스는 절대왕권이 지배하던 앙시앵레짐(Ancien Regime: 구체제) 하에서 도시 자본가, 인텔리 계급이 증가하고,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 의식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왕과 귀족계급은 개혁을 거부했고 국민의 98%를 차지하던 평민·농민(제3계급)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덧붙이자면, 바스티유에는 7명의 죄수가 감금되어 있었는데 4명은 경제범, 2명은 정신병자, 1명은 성범죄자였다. 즉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은 혁명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후 폭력, 기습, 탈취, 처형, 학살, 공포를 동반한 혁명은 2년에 걸쳐 프랑스의 모든 것을 전복시켰다. 기요틴(guillotine)이 프랑스혁명의 상징이 된 것은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자유주의와 인권, 시민권력 사상이 주변 국가로 번져나가 전 유럽을 진동시켰다.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1793년 파리 집정관 회의에서 채택된 표어이다. 그러나 좋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맺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혁명은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웠으나 나폴레옹이 일으킨 군사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75년 동안 공화정-제국-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면서 왜곡되고 굴곡된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프랑스대혁명이 고귀한 이유는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을 전 세계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 성직자에서 시민·자본가 계급으로 이동하는, 완전한 신세기를 우리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 Ⓒ김호경

코제트와 마리우스

청년 마리우스 퐁메르시는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으며 아버지의 얼굴은 시체가 된 후에야 처음으로 보았다. 마리우스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왕당파였지만 아버지의 업적을 알고 난 후 공화파로 변한다.

제 아버지는 겸손하고 용감한 분이셨습니다. 공화국과 프랑스를 위해 훌륭히 싸우시고 인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역사 속의 위인이셨습니다. 그랬는데도 결국에는 잊혀지고 버림받은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단 한 가지, 조국과 저라는 이 배은망덕한 자식을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꾸중과 비난이었다.

이 못된 놈! 네 아비가 어떤 놈인지 난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놈들은 죄다 부랑자고 살인자고 혁명당원이고 도둑놈들이었다!

일면 맞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보수주의자들은 혁명당원을 도둑놈 취급한다. 혁명으로 인해 삶의 질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용납할 수 없는 마리우스는 집을 나와 각고의 노력 끝에 변호사가 되고 뤽상부르 공원의 한적한 오솔길에서 노신사와 소녀를 만난다. 16살 코제트와 20살 마리우스의 슬픈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올 일은 결국 오고야 마는 것

<레 미제라블>은 1862년 6월 봉기를 주 무대로 한다(그러므로 <레 미제라블>을 읽기 전에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먼저 읽어야 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비참하다. 장 발장을 필두로 버림받은 여직공 팡틴, 그녀의 가엾은 딸 코제트, 코제트를 사육하는 테나르디에 부부, 그녀의 딸 에포닌, 코제트를 사랑하는 마리우스, 장 발장을 추적하는 자베르... 모두가 비참한 사람들이다. 몇몇은 장 발장을 능가할 정도로 삶이 더 비참하다. 단지 디뉴의 주교인 샤를 프랑수아 비앵브뉘 미리엘만이 베푸는 삶을 살았다. 그는 장 발장에게 (이미 훔쳐간) 6개의 은접시 외에 2개의 은촛대를 더 주면서 말한다.

“잊지 마시오. 절대로 잊지 마시오. 이 은그릇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겠노라고 약속한 일을 말이오.”

팡틴, 코제트, 에포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어쩌면 인류가 지속되는 한 착취받고 착취하는 사람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장 발장은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쓸쓸한 한구석에 묻혔다. 당연히 비석은 없으며 커다란 나무 밑에 돌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 돌도 오랜 세월 곰팡이와 이끼로 더러워졌다. 누군가 연필로 시를 적어놓았으나 비바람에 지워지고 말았다.

그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기구한 운명이었네. 그는 살았다. 하지만 자기의 천사를 잃었을 때 그는 죽었다. 올 일은 결국 오고야 마는 것, 낮이 지나면 밤이 찾아오듯이.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레 미제라블>이 아닌 <아, 무정>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논객칼럼=김호경] 

* 더 알아두기

1. <레 미제라블>은 상당히 긴 소설인데 독자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2년 계획을 잡고 읽기를 바란다.

2. 세계 4대 뮤지컬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이다.

3. 빅토르 위고의 또 다른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파리의 노트르담)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꼽추 콰지모도의 에스메랄다를 향한 광적 사랑이 흥미롭다.

4.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다른 소설은 찰스 디킨스(영국)의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가 있다.

5. 프랑스 소설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L'Étranger),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 스탕달의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Woman's Life),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La Porte ETroite) 등이 필독서이다. 한번쯤 들어보았을 제롬과 알리사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다.

6.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노트』(Le Cahier Gris) 역시 명작이다. 이 책은 『티보가의 사람들』 8부작 중에서 1부이다. 청소년(성장) 소설로 분류할 수 있지만 1부 이후로는 두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다.

7.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인간 조건』으로 콩쿠르상을 받은 소설가 겸 정치가이다. 격렬한 생애를 보낸 그는 드골 대통령 밑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를 문화 강국으로 끌어올렸다(우리나라의 이어령을 떠올리면 된다).

*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는 문화부가 있지만 미국에는 없다. 문화라는 것을 국가에서 관할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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