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들꽃여행]

학명은 Cypripedium macranthos Swartz. 난초과의 여러해살이풀.

[논객칼럼=김인철] 토요일이던 지난 5월 11일 이른 아침, 부푼 기대감 속에 산을 올랐습니다. ‘작년 이맘때는 만개했었는데, 오늘은 어떨까? 식구가 얼마나 늘었을까?’ 정상 부근에 군 훈련장이 있어 평일에는 입산이 금지되고 주말에만 등산이 허용되는 산. 그런 통제 덕택에 귀한 야생화가 나름대로 잘 보존되고 있는 명성산. 1년을 기다렸다 부리나케 달려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지만, 곧 만날 꽃을 생각하며 힘차게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런데 산등성이에 오른 순간, 아뿔싸!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오르는 내내 만나기를 고대했던 야생화의 자생지를 포함한 정상 한쪽이 시커멓게 타버린 것입니다. 얼마 전 산불이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더니….

며칠 뒤 낙담한 필자를 위로하려는 ‘꽃동무’의 배려로 강원도의 한 산을 찾았습니다. ‘몇 해 전 온종일 찾아 헤맨 끝에 겨우 알게 된 자생지인데,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았기에 아마도 잘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는 게 꽃동무의 장담. 하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안색이 어두워집니다. 산길 곳곳에 간벌(間伐)을 한 때문인지, 나무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좀 더 오르자 중간에 차가 다니는 임도가 나 있고 중간 중간 베어진 나무가 수십 개씩 쌓여 있습니다. 새로이 조림을 하려는 것이든 뭐든, 그곳에도 ‘개발의 손길’이 스며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혹여 나물꾼들이 먼저 보고 파 가지 않았을까 우려했는데, 점점 간벌 또는 조림 작업 중 자생지가 아예 훼손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커집니다.

“와! 이것 봐요, 작년에 4개가 피었었는데, 식구가 여섯으로 늘었어요. 그리고 올해 꽃을 피우지 않은 새싹도 2개나 됩니다.”

꽃동무가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렇게 만난 복주머니란입니다.

2019년 5월 중순 강원도 한 산에서 만난 복주머니란 군락. 깊어가는 연초록 봄 화창한 햇살 아래 연한 홍자색 복주머니란 6송이가 꽃대마다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붉은색 ‘복주머니’ 하나씩을 달고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김인철

Ⓒ김인철

그깟 꽃이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요란을 떠느냐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또는 “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고 한 시인들의 절창과 함께 삶이 농익는 날 꽃 한 송이에 담긴 함의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갈수록 자연환경이 훼손되는 데다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하면 손을 타기 십상이어서, 거의 모든 야생화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는 요즈음입니다. 이에 환경부는 특히 멸종 위기를 맞고 있는 식물을 골라 11종을 1급으로, 77종을 2급으로 지정, 특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복주머니란도 바로 2급 77종의 하나로 개발과 남획, 그리고 예기치 않은 산불 등의 위협을 받고 있는 희귀 야생화입니다.

2018년 5월 경기도 포천의 명성산에서 만난 복주머니란. 2019년에는 자생지가 불에 타는 바람에 싹도 틔우지 못했다. Ⓒ김인철

Ⓒ김인철

다른 야생화에 비해 꽃의 크기도 큰 데다 아주 먼 데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연한 홍자색 색상이 화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학명 중 속명 시프리페디움(Cypripedium)은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의미하는 시프리스(cypris)와 ‘슬리퍼’라는 뜻의 페딜론(pedilon)의 합성어인데, 항아리 또는 주머니 모양의 꽃잎이 마치 미의 여신 비너스가 신는 신발처럼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 이름은 라틴어 학명과 같은 의미의 ‘숙녀의 슬리퍼’(Lady's slipper)입니다.

2017년 5월 경북 보현산에서 만난 복주머니란. 단 한 송이에 불과하지만 온 숲을 밝힐 듯 환하게 피어 있다. 2018년 극심했던 가뭄 때문인지 싹은 나왔지만,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김인철

Ⓒ김인철

우리말 이름으로는 복주머니꽃·복주머니·요강꽃·까치오줌통·오종개꽃·작란화 등 그 가짓수가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최근까지 가장 흔하게 불렀던 이름은 개불알꽃, 또는 개불알란이었습니다. 타원형으로 길게 늘어진 아래쪽 순판이 굳이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아하 맞다’ 하고 고개를 끄떡일 만합니다.

높이 30cm 안팎까지 곧추선 줄기 끝에, 5cm 안팎의 꽃을 피우는 복주머니란. 커다란 주머니처럼 생긴 입술꽃잎의 모양에서 그 이름이 지어졌다. Ⓒ김인철

Ⓒ김인철

각종 도감에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야생에서 자생하는 복주머니란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색이나 모양이 너무도 화려하고 예쁜 탓에 보이는 대로 남획 당해 자생지가 파괴되고 있다는 뜻인데, 결국 2012년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됐습니다.

 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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