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탁의 말머리]

[오피니언타임스=석혜탁] 그레이 크러시! 걸 크러시는 들어봤지만, 그레이 크러시는 어쩐지 좀 낯설다.

최근 멋쟁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늘어나면서 ‘그레이 크러시’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걸 크러시(Girl Crush)’가 어떤 여성을 동경하거나 선망하는 마음을 일컫는다면, ‘그레이 크러시’는 멋진 시니어 라이프를 영위하는 사람에 대한 찬사와 응원을 가리킨다.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라는 말과도 맥이 닿아 있다. 머리가 세거나 노인을 의미하는 ‘그레이(Grey)’와 전성기,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의 합성어이다.

60대, 70대, 80대에도 인생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이 드는 것을 ‘퇴행’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완숙해지는 것으로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할담비’라고 들어봤는가?

지난 3월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가수 손담비 씨의 인기곡 ‘미쳤어’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화제가 된 할아버지가 있었다. 바로 77세의 지병수 할아버지다. 고운 춤선과 농염한 눈빛, 타고난 박자감에 네티즌들이 열광했고, 방송이 나간 후에 ‘할아버지 손담비’라고 해서 ‘할담비’로 불렸다.

얼마 전 그는 한 홈쇼핑 채널의 광고를 찍기도 했다. 평범한 할아버지였던 그에게 대표적인 유통 채널 중 한 곳인 대기업 계열 홈쇼핑회사에서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그는 광고모델이 되었을 뿐 아니라 TV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개인 유튜브 방송 채널도 오픈을 했다.

또 한국의 한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세계 최대 동영상 플랫폼 업체 유튜브의 최고경영자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바쁜 유튜브 CEO가 어떤 일로 한국까지 오게 됐을까?

놀랍게도 ‘Korea Grandma’로 불리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를 보기 위해 온 것이다. 유튜브 CEO 수잔 보이치키(Susan Wojcicki)는 다른 일정 없이 오직 박 할머니와의 만남을 이유로 방한하였다.

구독자가 80만명이 넘는 인기 유튜버인 박막례 할머니는 구수한 사투리와 유쾌한 입담으로 넓은 연령대에 사랑을 받고 있다. ‘계모임 메이크업’, ‘아이린 CF 패러디’ 등 다채로운 종류의 영상을 업로드해 인기 몰이 중이다.

할머니는 지난해 한국 대표 크리에이터로, 또 유일한 70대로 구글 본사에 초청되기도 했다. 미국 유명 패션 잡지와 인터뷰를 진행하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레이 크러시’의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런 실버 스타들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우선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들 실버 스타들이 깨 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모델이 되고 유튜버로 당당히 활동하는 이들의 열정과 노력에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이런 류의 스타들이 그동안 많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각 기업에서도 광고 모델로 이들을 모셔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울러 이들의 인생 스토리에 대한 공감도 주효했다. 이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했을 터. 내가 앞으로 어떻게 늙어갈 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고, 이들과 동년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할담비’ 지병수 할아버지는 사업 실패를 겪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됐지만, 즐겁게 살고자 노력했고,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해왔던 태도가 결국 빛을 본 케이스다. “제가 마음이 밝은 건 마음을 다 비워서 그렇다”며 삶을 관조하는 태도는 큰 울림을 안겨주었다. 박막례 할머니의 ‘43년 식당 은퇴식’이라는 에피소드는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들을 보며 젊디 젊은 내가 되레 용기를 얻었고, 자극을 받았으며, 주변 사람을 더 돌아보게 되었다. ‘그레이 크러시’라는 말이 진부한 용어가 될 정도로 더 많은 지병수 할아버지, 박막례 할머니가 나오면 좋겠다.

화려한 백발의 존재미학을 실천하는 멋쟁이 어르신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무엇보다 행복하시기를!

 석혜탁

- 대학 졸업 후 방송사 기자로 합격. 지금은 기업에서 직장인의 삶을 영위. 
- <쇼핑은 어떻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나> 저자. 
-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한다. 가끔씩 라디오에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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