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베일에 싸인 가야, 역사의 현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논객칼럼=김희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가야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최근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청동 말방울에 구지가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새겨있다는 발표가 있자 단번에 메인 이슈로 자리할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견해에 대해 증거와 검증도 없이 발표했다며 학계 일부에서의 반발이 터져 나왔지만, 가야를 대하는 최근의 기류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일부 남아있는 가락국기를 보면 가야는 기원전 42년에 건국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562년 사다함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대가야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전경
광개토왕비의 복제품, 비문에는 고구려가 왜를 물리친 기록이 등장하는데, 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고 했다. Ⓒ김희태

특히 가야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달리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채 연맹체 형태의 여러 나라로 구성돼 있었다. 흔히 전기와 후기의 구분은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관련이 있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경자년(=400년)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냈다. 이후 고구려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해 임라가야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렀는데, 성주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발성의 위치와 관련해 부산 동래구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이 사건의 여파로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본다.

대가야의 세력 판도, 출토되는 가야의 토기를 통해 대가야의 세력 범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김희태

한편 『삼국유사』 오가야조를 보면 금관가야와 함께 ▶ 아라가야(阿羅伽耶, 추정 함안) ▶ 고령가야(古寧伽耶, 추정 상주 함창) ▶ 대가야(大伽耶, 고령) ▶ 성산가야(星山伽耶, 추정 성주) ▶ 소가야(小伽耶, 추정 고성)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변한과 관련한 기록이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가야는 최소 12곳 이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직공도(梁職貢圖)에는 백제의 주변 소국으로 ▶ 반파(叛波, 반로국, 대가야) ▶ 탁(卓) ▶ 다라(多羅, 우리 기록에 없는 가야의 세력으로 추정) ▶ 전나(前羅, 안라, 아라가야 추정) ▶ 신라(新羅) ▶ 지미(止迷) ▶ 마연(麻連) ▶ 상기문(上己文), 하침라(下枕羅) 등이 거론되는데, 가야의 세력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 섬진강을 넘어 세계와 교역했던 대가야, 외교무대에 등장하다

이처럼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 군림했던 대가야는 양직공도에서 반파(叛波)로 등장하는데, 반로국(半路國)으로도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를 보면 대가야의 건국과 관련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夷毗訶)와 감응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을,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구지봉 설화와는 차이를 보이는데, 구간(九干, 아홉 촌장)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자 하늘에서 금상자가 내려왔는데, 열어보니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이가 수로왕으로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다. 이와 함께 다른 다섯 개의 알에서 태어난 이들도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 구지봉 설화의 핵심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 Ⓒ김희태
정견모주와 이비가 사이에서 태어난 대가야의 초대 왕 이진아시왕Ⓒ김희태
천신 이비가 Ⓒ김희태

일반적으로 가야하면 경상남도에 국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 고고학적 성과로 인해 대가야의 세력이 지금의 섬진강을 넘어 전라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한 대왕(大王)이 새겨진 긴목항아리를 통해 6세기 중엽 대가야의 세력과 왕의 권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외교로 눈을 돌려보면 대가야는 국제무대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이와 관련 『남제서』 동남이전 가라국조를 보면 가라왕 하지가 남제로 사신을 보냈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에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가야가 중국의 남조국가와 직접적인 외교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산동 고분군 44호분에서 출토된 야광조개 국자, 오키나와 산으로 넓은 범위에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희태
전북 부안의 죽막동 유적, 대가야는 섬진강을 통해 남제와 외교관계를 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실제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대가야 계통의 토기가 확인되기도 했다. Ⓒ김희태

 

당시 대가야와 신라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고 있었기에 중국과의 직접적인 통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루트의 개척이 필요했다. 때문에 섬진강을 활용하기 위해 전라도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북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의 발굴 과정에서 대가야 계통의 토기가 출토된 점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산동 고분군 중 44호분에서 출토된 ‘야광조개 국자’의 원산지가 오키나와로, 대가야가 일본열도 및 오키나와와도 교역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대가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고령

이러한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고령은 지금도 관련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크게 ▶ 고령 주산성(사적 제61호) ▶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 고령 대가야 왕궁지 ▶ 왕정(=어정) 등이 남아 있다. 우선 고령향교의 옆에는 대가야국성지(大伽倻國城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왕궁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있던 예전 비석에는 임나대가야국성지(任那大伽倻國城址)가 새겨졌었다.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이러한 근거를 찾기 위해 일제는 가야 지역의 고분을 대상으로 도굴 같은 발굴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출토된 상당수의 가야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때문에 지금도 가야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는 일본을 가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물론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외교사절의 성격으로 이해하거나, 그 주체가 일본이 아닌 백제라는 주장 등이 제기된 바 있고, 공식적으로 한국이나 일본의 학계 모두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고령향교 옆에 세워진 대가야국성지.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김희태
대가야 시대의 성곽인 주산성 Ⓒ김희태

 

한편 대가야 왕궁지에서 기마상이 위치한 고령군민체육관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주산성을 마주할 수 있다. 주산성은 지산동 고분군과도 인접해 있는데, 대가야에 의해 축성되어 조선시대까지 활용된 성곽이다. 경주나 부여 등의 왕성과 비교해볼 때 주산성은 피난 산성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대가야의 왕성(평지)=주산성(산)”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진흥왕조의 기록에 대가야의 성을 유추해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가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5천 명의 기병을 이끈 사다함이 대가야의 전단문(栴檀門)을 들어선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성 안의 사람들이 항복했다고 했는데, 해당 기록에 등장하는 전단문은 대가야 왕성의 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왕정, 고령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궁궐터 곁에 돌우물이 있는데, 어정(御井)이라고 전해지는 것이다. 이 우물은 왕정(王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대가야의 왕들이 우물을 마셨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재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에 자리하고 있는데, 과거에 우물은 주민들의 주요한 식수로 활용되었다. 이를 알 수 있듯 민속신앙의 하나인 우물고사를 지낸다거나 백제와 신라의 예에서 보듯 우물 내에서 제사에 쓴 것으로 보이는 토기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왕정의 주변에서도 대가야 시대의 토기편이 출토된 바 있다. 따라서 대가야의 추정 왕궁지와 함께 왕정 역시 함께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산동 고분군 5호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림왕릉으로 전해져오던 곳이다. Ⓒ김희태
금림왕릉에서 바라보는 일출 Ⓒ김희태

마지막으로 대가야의 대표적인 흔적이라고 하면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빼놓을 수 없다. 지산동 고분군은 멀리서도 산 능선을 따라 고분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한 눈에 조망된다. 바라보는 그 자체가 장관이라 할 만하다. 현재 고분은 도로 쪽 터널이 있는 덕곡재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의 고분으로 구분이 되고, 크게 지형적인 구분과 만들어진 시기의 구분으로 구성된다. 이 중 대형고분의 경우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힘이 강했던 높은 신분의 피장자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으로, 실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금림왕릉으로 추정되는 5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특히 5호분에서 지산동 고분군의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한 장소로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장소다.

고천원공원 Ⓒ김희태
회천변에 위치한 고령 장기리 암각화, 마을의 이름이 알터마을이다. Ⓒ김희태

또한 지금은 폐교된 가야대학교 고령캠퍼스 자리에는 일본 왕실의 고향이라는 고천원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대가야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천변 옆에 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제605호)가 자리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마을의 이름이 알터마을이라는 점이다. 보통 우리 고대사의 건국 시조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난생설화가 있는데, 알터마을에 남겨진 장기리 암각화의 도상 역시 주목해볼 지점이다. 이처럼 대가야의 경우 기록의 부재가 아쉽게 다가오지만, 그나마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는 유물과 현장에 남겨진 전승, 지명 등을 통해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대가야, 이러한 대가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고령은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간직한 현장이라 할 만하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 문화연구소장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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