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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 리처드와 방탄소년단[김부복의 잡설]
김부복 | 승인 2019.06.25 10:28

[논객칼럼=김부복] 어린 시절, ‘그 애’를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다.

‘그 애’는 약속장소에 10분쯤 늦게 나타나자마자 “빨리 가야한다”며 서두르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데 이렇게 바쁘냐고 물었더니, ‘이화여대’라고 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영국의 ‘세계적인 가수’ 클리프 리처드가 이화여대 강당에서 ‘내한 공연’을 하던 날이었다. 김모는 그 사실에 무관심하고 있었다.

‘그 애’는 얌전하고 내성적인 소녀였다. 김모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 ‘그 애’가 친구들과 이화여대 근처에서 모이기로 했다며 시계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 애’는 버스정류장으로 달음박질을 하고 있었다. 김모는 용돈을 아껴서 챙겨뒀던 ‘데이트비용’을 절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클리프 리처드의 공연은 TV로도 중계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컬러TV가 방영되기 전이라 ‘흑백’이었다.

공연은 엄청났다. 강당에 가득한 ‘그 애’ 또래의 소녀들이 외치는 함성이 흑백TV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클리프 리처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언론은 이를 ‘괴성과 기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소녀들은 클리프 리처드에게 손수건을 경쟁적으로 날리고 있었다. 클리프 리처드는 그 손수건 한두 개를 집어서 땀을 훔치더니 객석으로 던져주고 있었다. 소녀들은 곧바로 자지러지고 있었다. 글자 그대로 ‘광란’ 또는 ‘열광’이었다.

클리프 리처드가 히트송 ‘더 영 원스(The Young Ones)’를 부를 때는 소녀들이 ‘제창’을 하고 있었다. 그런 소녀들에게 클리프 리처드는 함박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소녀들은 그 웃음에 빠진 듯 일제히 ‘악’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악’ 소리에는 ‘그 애’의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자료를 뒤져보면,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공연은 1969년 10월 16일이었다.

극성 ‘소녀 팬’은 공연을 앞두고 몇 달 동안 ‘클리프 리처드 계’를 들어서 돈을 모으기도 했다. 지방의 여학생들은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상경하기도 했다. 공연 표를 사기 위해 늘어선 줄이 수백 미터나 되었다. 도시락을 까먹으며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소녀들이 수두룩했다.

김모는 클리프 리처드의 히트송의 가사를 달달 외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 클리프 리처드를 싫어하기로 작정했다. 클리프 리처드에게 ‘그 애’를 빼앗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덜떨어진 자격지심’이었다.

그리고 김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와 멀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소극적으로 보였던 ‘그 애’의 ‘열광’하는 모습이 공연히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김모에게 클리프 리처드는 이를테면 ‘원수’였다. 클리프 리처드는 멀쩡한 ‘남의 여친’의 마음을 강탈해간 ‘못된 가수’였다.

어쨌거나, 극성 소녀 팬이 외치는 ‘악’ 소리를 들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공연은 ‘악’ 소리의 ‘원조’였던 셈이다.

그 ‘악’ 소리가 익숙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그 ‘열광’은 갈수록 요란해지고 있었다.

1992년 1월 17일 서울 잠실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던 미국 5인조 팝그룹 ‘뉴키즈온더블록’의 내한 공연 때는 수백 명의 팬이 공연장으로 돌진하면서 앞쪽 바닥에 앉아 있던 여고생이 깔려서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여고생은 병원으로 실려간지 32시간 만에 결국 숨졌다고 했다.

이들이 입국하던 날에는 공항이 마비되기도 했다. 여학생 수백 명이 한꺼번에 다가가려고 하는 바람에 서로 밟고 밟히는 등 아수라장이었다. 수십 명이 쓰러지고 얼굴과 다리 등에 타박상 입은 소녀가 적지 않았다고 했었다.

Ⓒ방탄소년단 공식 홈페이지

그런데, ‘역전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되레 세계 여성의 ‘여심(女心)’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방탄소년단’이다.

방탄소년단 때문에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을 구경하기 위해 ‘텐트촌’까지 생기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공연은 그대로 ‘축제’가 되고 있다. 방탄소년단을 취재하기 위해 세계의 언론이 모이고 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한국어’로 따라 부르고 있다. 한국어는 ‘만국공용어’가 되고 있다.

몇 해 전에는 ‘국제가수’ 싸이가 한국어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기분이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하다”며 “이 무대에서 한번쯤은 한국말을 해보고 싶었다. 죽이지?”라고 당당하게 우리말을 한 것이다. 싸이는 한 야외무대에서 인터뷰 도중에 수많은 미국 시민이 보는 가운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기도 했었다.

방탄소년단과 싸이가 클리프 리처드에게 당했던 김모의 앙갚음(?)을 통쾌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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