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성의 일기장]

[청년칼럼=김우성] 나는 자가용이 없다. 그래서 멀리 이동할 때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님들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출발 예정 시각에 정확히 출발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기사님은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정각에 맞춰 버스를 움직인다. 오전 5시 30분에 운행하는 첫차는 매일 그 시간에 출발한다. 운행을 펑크내거나 출발 시각에 겨우 맞춰 부랴부랴 뛰어오는 기사님은 본 적 없다. 기사님은 늘 운전석에 앉아 대기 중이고, 당장이라도 출발할 준비를 완료한 모습이다. 피곤한데 조금만 더 이따 출발해도 되냐고 묻는 기사님은 없다. 이런 이유, 저런 사유로 1, 2분이라도 출발을 지연하는 법이 없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늦을 수 있고, 그런 상황을 승객들도 아주 이해를 못하지는 않을 텐데 애초에 늦을 일은 가급적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웬만하면 지연 출발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한 번은, 고속버스를 타려고 터미널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타야 할 버스가 조금 늦게 왔다. 기사님은 교통체증으로 인해 늦게 출발하게 되어서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화를 내는 승객은 없었다. 되도록 약속 시간을 지키려하고, 부득이하게 늦으면 사과를 하는 기사님의 태도가 멋있다.

승객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승차하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기사님은 버스는 멈춘다. 마찬가지로 하차하려는 승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속도를 줄여 정류장에 정차한다. 겨우 한 명 태우려고, 혹은 겨우 한 명 내리게 하려고 갈 길도 바쁜데 여러 명 태운 버스를 굳이 멈춰야 하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기사님을 한 번도 본 적 없다. 

기사님은 소수의 의견도 중요하게 여긴다. 하차 벨을 누른 한 명을 무시하지도, 탑승하려고 저만치 정거장에서 손짓하는 한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마치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어 헤매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시대에 기어이 한 명을 챙기려는 모습은 이따금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이게 끝이 아니다. 운행 중 반대편에서 마주오는 버스와 옆을 스쳐 지나갈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기사님은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기사님은 다른 모든 버스 기사님과 아는 사이일까? 어떤 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도 하고, 워낙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바람에 누구인지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울 텐데. 하지만 누구인지 몰라도 인사하면 어떤가? 알면 반가워서, 몰라도 서로를 응원하고자 인사를 건네는 것일 테지. 단순한 손짓일지라도 인사를 하면 본인도,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지니까. 

심지어 어떤 기사님은 다른 버스와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달리다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옆 기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운전석 창문을 열어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며 여유는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수도 없이 타고 내렸던 버스. 지금까지 이름 모르는 수많은 기사님을 스쳐왔다. 돌이켜보면 스승을 가까이 두고도 멀리했다는 걸 깨닫는다. 버스는 대학이었고, 기사님은 교수님이었다.

평소 학교 안에서,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공부를 한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도, 책 없이도 공부할 게 참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시험은 치르지 않으니 다행이다.

기사님들께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김우성

낮에는 거울 보고, 밤에는 일기 쓰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