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나의 달빛생각]

[청년칼럼=이루나] 테헤란로로 출근하는 직장인들 손에는 전투 무기가 하나씩 들려있다. 커피다. 치열한 전쟁터에 살아남기 위한 직장인들만의 안쓰러운 생존법이다. 커피숍이 많다는 테헤란로이지만 유난히도 녹색 간판의 스타벅스가 많이 몰려있고 손님들도 많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출점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자전거 바큇살처럼 지점을 퍼져나가게 하는 허브 앤 스포크(Hub & Spoke) 전략이라고 한다. 어쩐지 우리 동네 근처에는 스타벅스가 없더라니.

내게 스타벅스는 남의 얘기였다. 대학생 시절 힘들게 아르바이트 비용을 모아 떠난 배낭여행에서 현지 기념품으로 시티 텀블러를 사 오는 정도가 유일한 소비행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궁핍한 수험생이 되자 스타벅스는 더 멀어졌다. 커피값 한잔이면 고시 식당 한 끼다. 스타벅스 커피는 기호품이 아니라 사치품이었다. 그래도 스타벅스 공간은 매력적이었다. 약속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을 때, 점원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어 쉬는 공간으로 애용하곤 했다. 더운 여름, 추운 겨울, 비 오는 날엔 쾌적하고 사람이 붐비는 스타벅스는 동네 정자처럼 쉬어가기 안성맞춤이었다.

어렵사리 직장인이 되어서도 스타벅스와 친해지지 않았다. 회사에는 원두커피 기계가 있었고, 신입 직장인 월급 수준에 커피에 쓰는 돈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선배가 사주면 감사히 마시고, 아니면 그만이었다. 연말이면 다이어리 제공행사에 눈길이 갔지만 한 달 동안 17잔의 커피를 마실 자신이 없었다. 직급이 올라가고 업무량이 늘어나며 카페인 섭취도 덩달아 급증했지만, 스타벅스는 여전히 나와 먼 공간이었다.

Ⓒ픽사베이

1년 전 카드 회사에 다니던 친구로부터 직장인에게 적당하다는 카드를 추천 받았다. 다양한 혜택 중 스타벅스 50% 할인이 있었다. 혜택이 아까워 일단은 써보기로 했다.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몇 번 들르다 보니 직장 동료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스타벅스 앱부터 설치하라고 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앱을 설치했더니 구성이 아주 단순했다. 고객 레벨, 스타벅스 카드 잔액, 사이렌 오더, 새로운 소식 등이 화면의 전부다. 단순함이 함정이었다.

사용하기 쉽게 만들고 빠져나가기는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스타벅스에는 웰컴, 그린, 골드 레벨이 있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스타벅스 카드에 일정 금액을 충전하고 사용하여 ‘별’이라는 보너스를 획득해야 한다. 일정 별이 쌓이면 레벨이 올라가고 무료 커피 쿠폰 등의 혜택을 준다. 게임 캐릭터를 키우는 기분이다. 사이렌 오더는 신세계였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음료를 마음껏 주문할 수 있었다. 스타벅스 카드로 결제하면 추가 옵션도 무료로 제공한다. GPS 기반으로 내 주변 스타벅스 매장에 미리 주문하면 도착할 때쯤 나만의 커피가 만들어져서 제공된다. 애써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다. 스타벅스도 주문 접수에 쓰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시스템이다.

점점 아침 출근길에 녹색 간판이 눈에 밟힌다. 무의식적으로 앱을 키고 사이렌 오더를 누른다. 여름맞이 이벤트 행사에도 자동으로 참여가 되었다. 한 달 새 17잔의 이벤트 쿠폰을 모으고 인어 로고가 선명히 그려진 비치타월을 받았다. 인기가 많아 동나기 전 매장 개점 시간에 맞춰 힘들게 교환했다. 딸아이와 함께 물놀이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나니 뿌듯한 기분마저 든다. 레벨이 올라가니 덩달아 무료 쿠폰도 쌓인다. 쿠폰을 쓰고 별을 모으기 위해 스타벅스에 들른다. 함정에 빠졌다.

스타벅스는 영리하다. 본질은 커피를 팔지만, 이름에서 아예 커피를 떼버렸다. 핵심 상권에만 진출하는 부동산업, 스타벅스 카드를 통한 금융업, 앱을 통한 IT 기반 서비스업까지 아우르고 있다. 게다가 소비자에게 친절하고 고급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가격도 몇 년째 올리지 않고 있다. 나 같은 뜨내기손님도 충성고객으로 만드는 마케팅 전략도 잘 갖추고 있다. 환경 보호 트렌드에 맞추어 종이 빨대를 제공하거나, 공정 무역 원두를 사용하며 사회 공헌 활동에도 동참한다. 뭐든지 다 잘하는 커피계의 엄친아다.

스타벅스 커피 맛은? 잘 모르겠다. 습관처럼 마신다. 내가 즐겨 마시는 아이스 라떼는 맛이 일정하고, 우유는 신선한 느낌이 난다. 그거면 족하다. 금융 자산을 통합 관리해주는 뱅크 샐러드 앱에서 경고 메시지가 날아왔다. 친절한 금융비서가 갑자기 커피 관련 지출이 늘었다고 주의하란다. 커피는 선배가 사줄 때 먹는 거라는 알뜰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커피를 얻어 마실 선배보다 사줄 후배가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스타벅스도 한국에 진출한 지 어느덧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커피 프랜차이즈 계의 최고참이다. 언제쯤 스타벅스처럼 유능하고 매력적이면서 커피도 잘 사는 예쁜 선배가 될 수 있을까?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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