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논객칼럼=이동순] 숲을 거닐 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 숲은 얼마나 쓸쓸할까요? 인간 세상에서 숲의 새소리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가수가 부르는 절절한 노래가 아닐까 합니다. 새소리가 있어서 숲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가수들의 좋은 노래가 있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은 한결 반감되고 위로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강탈당하고 갖은 유린을 겪던 시절,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때에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 한 곡은 우리 강토를 깊은 슬픔과 격동 속에 잠기도록 하였습니다.

대체 깊은 슬픔이란 무엇일까요? 다만 슬픔의 늪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깊은 슬픔이 아닙니다. 슬픔을 불러오게 한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파헤치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분별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을 깊은 슬픔은 가졌습니다. 식민지 시대 가요계에는 슬픔에 잠긴 우리 겨레의 가슴을 쓰다듬고 위로해주던 많은 가수들이 있었으나 이난영 만큼 생기롭고 발랄하며 상큼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해주었던 가수는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가수 이난영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의 성음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거의 모진 핍박에 가까운 고난과 역경이 바로 그 힘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그 어떤 신산한 지경에 허덕일지라도 이난영은 결코 무릎을 꿇거나 비굴하지 않는 자세로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혜와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이난영의 대표곡이 수록된 LP음반 Ⓒ이동순

1916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어릴 때 이름이 옥순(玉順)입니다. 항상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지독한 가난 속에서 가족 모두는 고달픈 삶을 이어갔습니다. 지금 사진으로 남아있는 목포시 양동 이난영의 옛집 전경을 보면 너무도 작고 남루하기 짝이 없습니다.(지금 이곳은 이난영 소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다니던 옥순은 학교도 가다말다 하던 중 4학년 재학시절에 기어이 퇴학원서를 나카무라 교장에게 제출하게 됩니다. 삼촌댁에서 더부살이 아이로, 혹은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의 일본인 가정에 들어가서 아이보개와 식모살이로, 혹은 떠돌이 유랑극단에서 무명의 막간가수로… 이것이 목포의 가련한 소녀 이옥순이 겪었던 눈물의 시간이었습니다.

목포시 양동에 있었던 이난영의 옛집 Ⓒ이동순
이난영의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 4학년 퇴학원서 Ⓒ이동순

1930년대 초반 박승희가 운영하던 이동극단 태양극장의 이름 없는 막간가수로 일본공연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 무렵 단장 박승희가 옥순의 예명을 이난영이라 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활동도 고달픈 역경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밥도 굶고 생활비도 떨어져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을 때 이난영은 마침내 오케레코드라는 멋진 활동무대와 만나게 됩니다. 일본 방문 중이던 이철 사장과의 운명적 만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1933년은 이난영의 나이 17세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던 화려한 무대의 시간이었습니다. 첫 데뷔곡 '불사조(不死鳥)'(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 오케 1587), ‘고적(孤寂)'(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 1587) 등을 필두로 '지나간 옛 꿈'(김파영 작사, 김기방 작곡, 태평 8068), '향수'(김능인 작사, 염석정 작곡, 오케 1580) 등을 잇달아 발표하게 됩니다.

능라적삼 옷깃을 여미고 여미면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 소매를 적실 때
장부의 철석간장이 녹고 또 녹아도
한양 가는 청노새 발걸음이 바쁘다

때는 흘러 풍상은 몇 번이나 바뀌어도
일편단심 푸른 한이 천추에 끝이 없어
백골은 진토 되어 넋은 사라졌건만
죽지 않는 새가되어 뼈아프게 울음 우네

이내 몸이 왔을 때는 그대 몸은 무덤 속
적막강산 뻐꾹새도 무정함을 호소하니
영화도 소용없고 부귀는 무엇하나
황성낙일 옛터에 낙화조차 나리네

-'불사조' 전문

이난영의 데뷔곡 '불사조' 가사지 Ⓒ이동순

‘불사조’ 노래는 고전 춘향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옥중에 갇혀 고생하는 춘향이의 애달픈 심정을 나타낸 처연한 노래입니다. 전 조선의 가요팬들은 애교를 머금고 때로는 대목대목 앓는 듯한 느낌의 독특한 코맹맹이 창법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전혀 녹을 기색조차 없던 슬픔과 한이 이난영의 노래를 듣는 순간 스르르 녹아내려 눈시울을 흥건히 적시곤 했던 것입니다. 이난영의 두 번째 히트곡으로는 '봄맞이'(윤석중 작시, 문호월 작곡, 오케 1618)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모진 겨울에서 슬금슬금 풀려나는 이른 봄, 이 노래의 구성진 가락을 듣노라면 가슴 속 차디찬 빙하가 녹아내리는 기적을 경험하곤 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느니 온통 이난영의 노래요, 그 창법과 음색의 흉내였습니다.

얼음이 풀려서 물 우에 흐르니
흐르는 물 우에 겨울이 간다
어허야하 어어야 어허으리
노를 저어라 음 봄맞이 가자

냇가에 수양버들 실실이 늘어져
흐르는 물 우에 봄 편지 쓴다
어허야하 어어야 어허으리
돛을 감어라 음 봄맞이 가자

제비 한 쌍이 물차고 날아와
어서 가보란다 님 계신 곳에
어허야하 어어야 어허으리
노를 저어라 음 봄맞이 가자

-'봄맞이' 전문

아동문학가 윤석중이 작사한 이 노래는 이난영 특유의 애조를 타고 한반도 전역에 구성지게 울려 퍼졌습니다. 아름다운 봄날, 이 노래의 가락과 가사는 어찌 그리도 처연하고 구슬픈 느낌이 들던 지요.

이난영의 노래에 가사를 많이 제공했던 작사가로는 조명암, 박영호, 이규희. 남풍월, 김능인, 윤석중, 차몽암, 박팔양, 신불출, 양우정, 강해인 등입니다. 주로 시인들이 많은 작품을 주었습니다. 작곡가로는 문호월, 염석정, 홍난파, 이면상, 손목인, 박시춘, 김해송, 이봉룡 등 당대 최고의 대가급이었습니다. 이난영 노래의 특색이라면 밝고 생기로운 느낌이 드는 청년기 세대들의 생기롭고 발랄한 삶에서 테마를 선택한 작품들이 많았고, 이난영이 이를 잘 소화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경쾌하고 깜찍하며 산뜻한 정서가 듬뿍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김해송과 함께 만든 작품 중에는 재즈 스타일의 노래들도 많았습니다. 더불어 이난영의 노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신민요풍의 곡입니다. '오대강 타령' '이어도' '녹슬은 거문고'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작사가 김능인과 작곡가 문호월 콤비에다 이난영의 창법이 조화를 이루면 더할 나위없는 멋진 트리오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이난영의 생애에서 최고의 해가 찾아왔습니다. 1935년, 그녀의 나이 19세 되던 해에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이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이 음반은 무려 5만장이나 팔려나가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이난영은 단번에 가요계의 여왕 자리에 올랐습니다. 한 곡의 유행가는 식민지 땅을 온통 흐느낌으로 잠기게 하였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장소로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전문

1935년에 발매된 '목포의눈물' 음반 라벨 Ⓒ이동순
'목포의눈물' 가사지 Ⓒ이동순

마치 꽁꽁 앓는 듯한 이난영 특유의 콧소리에다 흐느끼는 듯 잔잔하게 애간장을 토막토막 끊어내는 느낌의 창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노래였습니다. 모두들 입을 모아 이난영의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의 오묘한 효과가 그대로 배어난다며 무릎을 쳤습니다. 가슴에 깊은 슬픔이 자리 잡고 떠나지 않는 독자들이 계시다면 이 노래를 혼자 나직이 흥얼거려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어떤 반응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가만히 지켜보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사실 이 노래는 가사에도 반영되어 있듯 일제에 대한 한과 저항의 혼이 표현된 민족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조선일보와 더불어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조선 10대도시 찬가모집) 기획으로 가사를 공모했었는데, 여기에 목포에 거주하고 있던 청년시인 문일석(본명 윤재희)이 응모하여 최고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당시 10대 도시란 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 등입니다. 이를 살펴보면 북한지역과 남한지역이 각각 반반으로 나뉘어져 잇습니다. ‘목포의 눈물’의 첫 제목은 ‘목포의 사랑’입니다. 이철 사장은 처음 울산 출생으로 이미 ‘타향살이’ 등을 히트시켰던 오케 대표가수 고복수가 부르도록 낙점해두었으나 손목인의 이의제기로 이난영이 취입할 수 있었습니다. 손목인은 가사에 나오는 지역의 정서를 가장 잘 체득하고 있는 가수에게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해야 최고의 가창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한 조선 10대 도시찬가 모집 광고 Ⓒ이동순
일본에서 이난영을 발탁해 온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 Ⓒ이동순

노래 ‘목포의 눈물’을 유심히 들어보노라면 독특한 효과가 가슴 속으로 전해져 옵니다. 울음인가 하면 그 울음을 기어이 뛰어넘는 어떤 결연한 끈기가 느껴지고, 하소연인가 하면 그 하소연을 성큼 뛰어넘는 우뚝한 걸음걸이가 실감이 됩니다. 노래 속에 눅진하게 배어나오는 남도 특유의 육자배기, 진도씻김굿 등의 음악적 파장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그리하여 절창이자 민족의 가요가 된 ‘목포의 눈물’은 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근대사의 고단한 세월과 맞물리면서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다부지게 자리 잡게 된 무형문화유산으로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목포의 눈물’ 한 곡으로 최고의 여가수로 등극한 이난영은 이제 화려한 위상으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 데이지쿠레코드사에는 그녀를 일본으로 정식 초청하여 순회공연을 하고, 또 일본 음반을 취입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발매된 이난영의 음반에서는 이름을 오카란코(岡蘭子)로 썼습니다. 일본인 작사가 시마다(島田)가 한국의 민요 ‘아리랑’을 새롭게 다듬고, 작곡가 스키다(杉田)가 편곡을 해서 취입을 했는데, 이난영은 당시 한국의 민요만 여러 곡 취입을 했습니다.

일본 데이지쿠레코드에서 발매된 이난영의 노래 '아리랑' Ⓒ이동순

대중잡지 ‘삼천리’가 주최했던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이난영은 왕수복, 선우일선 등 기생출신 가수 다음으로 3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4위는 전옥, 5위는 김복희였습니다.

비록 천신만고 끝에 인기가수가 되었지만 이난영에게 시련과 역경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작곡가 겸 가수로 오케레코드사 악극단이 전국순회공연을 다니던 시절, 이난영은 불세출의 대중음악인 김해송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결혼도 하기 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이철 사장은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도록 주선해줍니다. 성탄절 이브에 경성의 유명했던 요릿집 식도원(食道園)에서 이기세(李基世)의 주례로 두 사람은 혼례식을 올립니다. 그날 식장에는 오케레코드사 전속악단이 결혼행진곡과 흥겨운 재즈음악을 연주했고, 신랑 김해송이 노래를 독창으로 불렀으며 무척 흥겨운 분위기로 예식과 피로연을 마쳤다고 합니다. 부부가 모두 대중음악인이라 엄청 바쁜 공연스케줄이 있었을 터인데도 그것을 모두 소화해가며 무려 12남매의 자녀들을 출산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부로 항시 세인들의 관심에 오르내렸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시절은 봄눈처럼 너무도 짧기만 했습니다.

이난영 김해송 부부의 결혼을 알리는 신문기사 Ⓒ이동순
단란하던 시절의 이난영 김해송 부부 Ⓒ이동순
행복하던 시절의 김해송과 자녀들 Ⓒ이동순

1937년에는 오빠 이봉룡과 함께 ‘고향은 부른다’(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를 오누이 합창으로 불러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이 음반은 그들이 떠난 고향 목포를 생각하며 추억을 되새기는 작품인데, 이봉룡의 매부 김해송이 곡을 붙여서 더욱 이채로운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난영은 고향 목포를 추억하는 노래를 여러 곡 발표했는데, ‘목포는 항구’, ‘해조곡’ 등이 그것입니다. 1938년에는 오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가수 이난영을 위해 ‘이난영걸작집’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는데, 이 앨범에는 그녀의 대표곡 ‘알아달라우요’, ‘아 글쎄 어쩌면’ 등 여러 곡이 연극배우의 해설과 더불어 흥미롭게 엮어져 있습니다.

이난영과 오빠 이봉룡 Ⓒ이동순

일제말로 치달아가던 1941 이난영은 오케레코드사 대중음악인들로 구성된 조선악극단 대표멤버로 일본순회공연에 참가해서 동포들의 뜨거운 환호와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오케 소속 여성 전속가수로 구성된 ‘저고리시스터즈’의 대표멤버로 이난영의 활동은 매우 두드러졌습니다.

조선 악극단 시절의 '저고리시스터즈 Ⓒ이동순
조선악극단 광고 책자 표지에 실린 이난영 Ⓒ이동순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남편 김해송은 발 빠르게 악극단을 조직했고, 그 명칭은 K.P.K.였습니다. 그것은 연주자 백은선을 비롯한 조직 멤버들의 이니셜 알파벳을 따서 지은 즉흥적이고도 무의미한 이름입니다. 김해송이 워낙 재즈, 블루스 등 미국음악에 능숙했던 터라 당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김해송의 납북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빌미가 될 줄 누가 알았으리오. 악극단이 무수히 난립해서 운영되던 시절, K.P.K.악단은 당시 최고의 멤버들로 조직되어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전국순회공연 중 한번은 춘천에서 머물던 무렵인데, 이난영이 밤 깊은 소양강 가에 신발과 유서를 남겨놓고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이것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 유서에는 남편 김해송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김해송의 여성편력이 문제가 되어 부부간에는 자주 분쟁이 있었는데 결국 이런 사태로까지 발전된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47년 조국의 분단을 크게 염려하고 통합을 갈망하는 노래 ‘흘러온 남매’, ‘남남북녀’ 등을 발표할 정도로 정분이 깊고 사랑은 지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아비는 너희들이 한없이 그리워도
가로 막힌 운명선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삼천리강산에 삼팔이란 웬 말이냐
목을 놓고 울어봐도 시원치 않다

너희들은 남쪽에서 끝까지 참아다오
이 아비는 북쪽에서 힘차게 싸우겠다
다 같은 혈족이요 우리나라 민족이다
붉은 피 한 방울을 아낄손가

-‘흘러온 남매’ 부분

1947년에 발매된 노래 '흘러온남매' 라벨 Ⓒ이동순
해방 직후 KPK악단에서 지휘하는 김해송 Ⓒ이동순

1950년 6·25전쟁의 세찬 풍파는 이 사연 많은 부부의 거리를 영원한 분단과 이별로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 김해송은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있었는데, 결국 체포되어 인민군보안대로 잡혀갔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해방 직후 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며 이를 밀고한 사람은 다름 아닌 K.P.K. 소속의 직속후배였습니다. 그 후배는 평소 좌파사상을 가졌는데, 전쟁직후 이를 바로 고발해서 선배가 잡혀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이난영은 남장(男裝)을 하고, 얼굴엔 숯검정을 칠해 서대문형무소 주변을 수없이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김해송은 다른 숱한 반공포로들과 함께 한 많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일설에는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북한 측 자료에는 결핵이 발병하여 원산의 요양원에서 1950년대 중반에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합니다. 1920년대 미국의 재즈음악을 받아들여 즉시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며 대중음악 작곡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수용했던 천재적이고 전설적인 대중음악인 김해송의 삶은 이렇게 마감이 됩니다. 제자 손석우가 스승의 음악적 명맥을 유일하게 이어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K.P.K.악단에서의 부부의 활동은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4월 초순까지도 적극적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서울 시공관에서 9일 동안 절찬리에 펼쳐진 양춘대공연 오페레타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영화배우 복혜숙을 비롯한 여러 유명배우와 대중예술인들이 총출연하는 큰 공연이었습니다. 이 공연은 전2부 14경(景)으로 구성된 꽤 중량감 있는 무대작품이었습니다.

1950년 4월에 공연된 KPK악단 공연광고 Ⓒ이동순

남편이 납북을 당한 뒤 이난영은 K.P.K.악극단 운영을 자신이 계속 꾸려가기로 했습니다. 명칭도 ‘이난영악단’으로 바꾸고 혁신대공연을 무대 위에 올렸으나 뚜렷한 반응을 얻지 못한 채 이후 한 해를 채 넘기지 못하고 파산에 이르게 됩니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이끌어간다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무렵 이난영은 음악에 재능을 타고난 자녀에게 종아리를 때려가며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자신의 두 딸과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 하나를 엮어서 김 시스터즈를 발족시켰습니다. 아버지를 빼어 닮아서 악기연주와 가창에 능한 세 아들도 이런 과정으로 가르쳐 김 보이스로 발족시켜 모두 미국으로 진출시켰습니다. 특히 김 시스터즈는 미국생활에 잘 적응하며 활동의 터전을 마련하고 음반을 취입하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홀로 남은 어머니 이난영은 늘 고독했습니다. 하루빨리 미국으로 와달라는 자녀들의 성화에 못 이겨 태평양을 건너간 어머니는 잠시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며, 때로는 1960년대 미국의 유명한 대중음악 무대인 설리번 쇼에 김 시스터즈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난영에게 미국생활은 전혀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발표된 김시스터즈의 독집앨범 Ⓒ이동순

자녀들이 그렇게 만류했건만 어머니는 기어이 서울로 돌아와 회현동 옛집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신 카나리아가 운영하는 명동 카나리아다방에 가면 가요계의 옛 동료들을 늘 만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1957년 선배가수 고복수가 드디어 무대를 떠나는 고별공연을 서울 시공관에서 개최하게 되었을 때 가요계 동료 후배들 100여명은 우정출연으로 무대 위에 올라서 원로가수와의 작별을 서러워했습니다. ‘펜이여 안녕! 무대여 안녕! ’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열린 이날 공연에서 이난영은 역시 자신의 대표곡 ‘목포의 눈물’ 1, 3절을 불렀습니다.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슬픈 간주곡의 여운이 관객들의 애간장을 더욱 애달픈 분위기로 이끌고 갔습니다. 이난영은 노래 1절을 부르고 간주가 이어진 다음 2절을 부르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실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이란 대목에서 기어이 가슴 속 저 밑바닥에 켜켜이 쌓였던 한과 슬픔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서 울음 절반, 흐느낌 절반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간 겪었던 삶의 파란곡절과 가파른 운명에 대한 애달픔 따위가 일시에 혼합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창법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마무리 대목에서는 그날의 주인공 고복수가 함께 이난영 옆으로 와서 합창으로 도와주어 겨우 아슬아슬하게 노래를 마칠 수가 있었지요. 방송국에 실황녹음 테이프로 남아있는 그날의 노래를 듣노라면 그 누구라도 함께 북받치는 심정으로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들게 됩니다.

이난영은 자신의 대표곡 ‘목포의 눈물’을 아마도 수천 번 이상 무대에서 불렀을 터이나 울먹이며 부르는 그날의 노래가 단연 최고의 절창으로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복수 은퇴기념공연 Ⓒ이동순
수심에 찬 얼굴로 '목포의눈물'을 부르는 이난영 Ⓒ이동순

고독과 적막 속에서 이난영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져만 갔습니다. 술과 담배, 때로는 아편을 맞기도 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재기의 몸부림을 쳤지만 곧 고통과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1961년 이난영은 무대 위에서 역시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되었는데 가수가 1절을 부르고 난 뒤 뒤로 물러서면 측근에 대기하고 있던 성우가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상품 광고 멘트를 넣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어느 테이프 속에는 동산유지라는 회사에서 만든 가루비누 ‘원더풀’ 선전광고가 들어있는 우스꽝스런 무대분위기와 대면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간주곡 대신 CM광고를 넣는, 그것도 성우가 직접 출연해서 광고문구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무대공연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근대광고사에서도 흥미로운 기록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더풀 원더풀 무엇이 그렇게 원더풀일까요?

다름 아닌 동산유지의 가루비누 코피 원더풀이 바로 원더풀입니다.'

이 광고 문구를 직접 발성으로 내보내고 난 뒤 성우가 뒤로 빠지면 다시 가수 이난영이 마이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노래의 나머지 소절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 무렵 결핵으로 투병하던 가수 남인수를 만나 측은한 마음에서 병수발을 이따금 들어주곤 하다가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지게 됩니다. 기어이 동거생활까지 하면서 두 사람은 마치 불나비 같은 사랑을 활활 태우게 됩니다. 이 시기에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파자마를 입은 남인수에게 차를 끓여서 이난영이 정성스럽게 바치는, 단란하고도 극진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무렵 부산에서 열린 공개방송에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적이 있는데, 이때 가족사항을 묻는 아나운서의 짓궂은 질문에 남인수는 양쪽 합쳐서 모두 몇 남매라고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합니다.

동거시절의 이난영과 남인수 Ⓒ이동순

결핵 3기를 훨씬 넘긴 남인수는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임종 무렵의 남인수는 애인 이난영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이난영은 흐느껴 울면서 ‘애수의 소야곡’을 불렀고, 그녀의 두 눈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은 생명이 꺼져가는 남인수의 이마와 얼굴로 방울방울 떨어졌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이별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았지만 한껏 정이 들었던 애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이난영은 또 다시 깊은 슬픔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던 이난영은 1965년, 결국 49세의 나이로 빈 방안에서 혼자 쓸쓸하게 최후를 맞습니다.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처연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비통하게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이난영의 장례식은 마치 국장을 연상케 하듯 많은 인파가 몰려 들어서 가수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969년, 이난영이 세상을 떠난 4년 뒤에 목포 유달산 자락에는 이난영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이 노래는 아난영 노래를 너무도 사랑하는 한 독지가의 노력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니 갸륵한 일입니다.

영화로 제작된 '목포의눈물' 포스터 Ⓒ이동순

경기도 파주의 어느 산중턱 공동묘지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묻혀 있던 이난영의 무덤은 찾는 이도, 벌초하는 사람도 없이 잡초로 더부룩 우거져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후 목포시에서는 자기지역이 배출한 한국문화사의 걸출한 위인 이난영의 위상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무덤이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목포시와 가요팬들은 마침내 파주 공동묘지에서 고향 목포로 이장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드디어 지난 2006년 어느 따뜻한 날, 이난영은 목포 삼학도 자락, 그녀의 어린 시절에 뛰놀던 고향 언덕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비록 세상을 한참 떠난 뒤이긴 하지만 감격적 귀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구름처럼 고향을 떠난 지 몇 해만입니까? 수목장(樹木葬)으로 조성된 그녀의 무덤은 이난영공원이란 이름을 달고, 편안하게 삼학도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제 가수 이난영의 영혼은 삼학도와 유달산 자락의 정겨운 바람결로 항시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 바람결은 지금도 남도의 거리거리에서 '목포의 눈물'을 도란도란 부르고 다닙니다.

목포 유달산 자락에 건립된 노래비 Ⓒ이동순
목포 삼학도 언덕에 조성된 이난영의 수목장 무덤 Ⓒ이동순

2016년 봄,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회장 이동순)에서는 이난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사업으로 ‘이난영전집’(CD 10매 분량)을 발간했습니다. 이 전집에는 국내외 음반수집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이난영의 모든 음반을 수집 정리한 음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뜻 깊은 사업과 더불어 목포가 배출한 위대한 가수를 추억하는 전시회, 감상회 등 다양한 행사들을 서울과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펼쳐 가요팬들의 뜨거운 호응과 박수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난영의 노래를 지금도 아끼고 사랑을 느끼면서 부르는 까닭은 고달팠던 지난 세월의 내력을 떠올리며 오늘의 우리 삶을 겸손하게 되새기고 평정을 회복하려는 내적 갈망 때문일 것입니다.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가 발간한 '이난영전집'(CD10매) Ⓒ이동순
목포 유달산에서 이난영을 추억하는 작곡가 손목인 Ⓒ이동순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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