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섭의 세상구경]

[논객칼럼=허영섭] 공휴일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동네 호수공원 산책길에 나서는 것이 주요 일과로 자리 잡은 게 오래 전부터다. 바깥 약속을 잡더라도 가급적 산책 시간만큼은 비워두곤 한다. 이제는 하나의 생활 습관으로 굳어졌다고나 할까. 서울 변두리의 여러 신도시 중에서도 유독 아파트값이 정체된 지역에 20년 이상 눌러 살고 있는 처지가 불만이긴 하지만, 공원 산책에서 얻는 마음의 위안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 보상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건강을 챙기는 방법으로도 그만이다.

계절이 바뀌면서 운치를 더해가는 공원 경치는 가히 일품이다. 야트막하지만 나름대로 숲이 우거진 동산도 있고, 그 아래 그늘집 옆으로는 물레방아도 돌아간다. 공원의 연륜을 말해주듯 어느새 훌쩍 자란 느티나무와 벚나무들 사이로는 키가 작은 단풍, 사철, 조팝, 빈도리, 고광나무 등이 적당히 조화를 맞추고 있다. 번갈아 꽃을 피우는 야생화의 향연도 자연의 선물이다. 이런 분위기는 다른 공원에서도 거의 비슷하겠지만 여기 호수공원은 산책길 내내 바라볼 수 있는 탁 트인 호수가 특히 자랑거리다.

Ⓒ픽사베이

그런데,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공원 산책을 즐기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점이다. 습관적으로 늘 같은 방향으로만 걷게 됨으로써 다른 쪽 방향의 경치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언젠가 공원 보도공사로 인해 부득이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새삼스럽게 느낀 사실이다. 이를테면, 산책길의 편향이다. 공원에 나설 때마다 주변 모습에 호기심의 눈길을 기울이곤 했어도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생소하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시야가 가려지기 쉬운 모퉁이 길에서는 더했다. 그 멋진 경치를 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산책길의 편향이 나 혼자만의 경우가 아니라는 점이다.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방향을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는 남학생이나 이웃 친구분들인 듯 유쾌하게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익숙해졌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산책길에 나선 시간대까지 맞춘 듯이 서로 자기 시간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산책길의 방향이나 시간대가 처음부터 의도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집이라기보다는 습관에 의한 편향이다.

돌이켜보면,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출발해 공원길에 접어들기까지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노래하는 분수대’ 광장을 가로질러 지나면서 산책길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지만 진행 방향대로 따라가다 보니 지금의 습관이 굳어졌을 것이다. 나름대로 산책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으므로 다른 길에 대한 동경이나 미련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단순한 반복에 의해 저마다의 생활 습관이 굳어지고 결과적으로 주변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비록 사소한 차이라 하더라도 산책길에서 맞닥뜨리는 상황 변화에 대한 인식도 다를 것이다.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전거의 행렬이 하나의 사례다. 반대편 방향에서는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나 자전거 주행선에 붙어 있는 이쪽 방향에서는 사고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달려와 스치듯 지나쳐가는 자전거 행렬은 주변에 눈길을 빼앗기기 쉬운 산책객들에게는 그만큼 위협적이기 마련이다. ‘시속 20㎞’를 강조하는 현수막이 공원 곳곳에 걸려 있어도 자전거 주행자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다.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걸어가는 산책객들에게도 자전거의 위협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호수공원 산책길을 얘기하면서 굳이 우리 사회의 분열상까지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시야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이다. 지역과 이념, 빈부, 연령, 남녀 등으로 나뉜 갈등 양상은 갈수록 거칠어지는 분위기다. 심지어 74주년을 맞은 이번 광복절에도 광화문 광장이 서로 다른 목소리의 주장으로 얼룩졌다. 앞으로 세월이 흐른다고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정치 지도자들은 남북통일의 희망가를 부르고 있건만 설령 성사된다고 해도 새로운 갈등 요인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게 되지나 않을까 지레 걱정이다. ‘소통’이니 ‘통합’이니 하는 구호가 난무하는데도 정작 우리 내부의 분열에 대해서는 정치적 득실 계산에 따라 오히려 방치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동안의 산책길을 조금만 벗어나도 다른 경치를 구경할 수 있고, 상대방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데도 우리의 현실은 너무 동떨어져 있다.

요즘은 가끔씩일망정 호수공원 산책길의 방향을 일부러 바꿔서 걸어보곤 한다.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경치를 바라보며 내가 걸어왔던 생활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철 무더위에 한동안 산책을 미루고 있었던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이제 말복도 지나 며칠 뒤면 더위가 가신다는 처서다. 이 길, 저 길을 걸으면서 공원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리라 생각해 본다.

 허영섭

  뿌리깊은나무 기자 

  전경련 근무

  현 이데일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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