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의 고구려POWER 27]

Ⓒ픽사베이

고구려 신대왕 8년(172), 후한이 ‘대병’을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은 즉시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여러 신하들이 주장했다.

“적은 군사 숫자가 많다고 고구려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겁이 많다고 간주,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습니다. 한 사람의 병사가 요새를 지키면 1만 명의 적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군사가 많더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니 나아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명림답부(明臨答夫)는 냉정했다.

“그들은 군대가 많고 강하니, 지금 맞서면 우리가 불리할 수 있습니다. 적은 1000리 넘게 달려왔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할 것입니다. 싸움이 오래 지속되면 저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벽을 높이 쌓고, 주변에 물구덩이를 깊이 파고, 들판을 비워두면 적이 공격하지도 식량을 구하지도 못해 철군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공격하면 필승입니다.”

임금은 명림답부의 ‘전략’을 받아들였다. 고구려의 전통적 방어수단인 ‘청야전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명림답부의 예상처럼 결국 후한은 병사를 되돌려야 했다. 명림답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수천 기병을 이끌고 추격, 좌원(坐原)이라는 곳에서 크게 무찔렀다.

찬란한 대승이었다.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남기고 있었다.

얼마나 철저하게 당했으면, 중국 측은 패전 사실을 기록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중국 측 역사에는 ‘좌원 전투’에 관한 기록이 한 줄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명림답부는 영웅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신대왕이 직접 찾아가서 슬퍼하고, 조회를 7일 동안 하지 않는 등 최고의 예우를 다했다. 수묘인(守墓人) 20가를 두어서 무덤을 지키도록 했다.

‘청야전술’을 펴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비축된 식량이 넉넉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들판을 비우고 농성을 하는 동안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적이 물러간 후에 수확도 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청야전술’은 고구려처럼 국력이 강하고, 경제력이 튼튼해야 가능할 작전이었다. 고구려는 집집마다 식량창고인 ‘부경’이 있을 정도로 비축식량이 많았다. 적이 쳐들어오면 부경에 있던 식량을 성 안으로 옮기면 그만이었다. 영토도 광활할 필요가 있었다. 고구려에는 ‘짱’인 전술이었다.

이 ‘청야전술’이 고려 시대 들어서는 ‘변질’하고 있었다.

고려 성종 12년(993), 거란이 침입했다. 성종 임금은 서희(徐熙∙942∼998)를 중군사로 임명하고, 스스로 안북부로 나아가 전쟁을 지휘했다.

하지만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을 함락시키고 선봉군사와 급사중 유서안 등을 포로로 잡았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중신회의가 소집되었다.

결론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황주에서부터 철령까지를 국경으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성종 임금은 서경의 창고 문을 열고 비축했던 쌀을 백성이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러고도 쌀이 남았다. 그러자 성종 임금이 지시했다.

“적의 식량이 될까 걱정된다. 대동강에 던져버려라.”

그렇지만 서희가 반대하고 나섰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힘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대방의 약점을 보아서 행동할 따름인데 어찌 갑자기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식량은 백성의 목숨인데, 차라리 적의 군량이 될지언정 헛되어 강 속에 버리겠습니까. ”

성종 임금은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서희의 외교’가 없었더라면, 고려의 쌀은 적의 식량이 되었을 것이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는 ‘희한한 청야전술’이 등장하고 있었다. 강화도 천도 때였다.

“최우(崔瑀∙1166∼1249)가 임금에게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니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가 녹봉을 옮기는 수레 100여 량을 빼앗아 가재도구를 강화로 옮기므로 서울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담당 관리에게 명령을 내려 날짜를 정해서 서울의 5부 백성을 보내게 하고, 성 안에 방을 붙이기를 ‘머뭇거리고 제때에 출발할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리하라’ 하였다.…”

‘청야’의 우선순위가 ‘권력자의 재산’이었다. 그 바람에 백성은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진흙길이 발목까지 빠져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었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자들 중에도 맨발로 업거나 이는 자들이 있었다. 과부나 홀아비, 고아나 혼자 사는 사람으로 갈 곳을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가장 ‘황당한 청야전술’은 조선 시대인 정유재란 때 벌어지고 있었다.

왜적이 곧 도성으로 들이닥칠 것 같아서 초조해진 선조 임금이 긴급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갑론을박 끝에 서울을 버리고 영변으로 몽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몽진에 앞서 준비할 것이 있었다. 먹을거리였다. 이미 임진년 왜란 때 먹을 것이 부족해서 고생했던 ‘과거사’가 있었다. 나라의 중신까지 데리고 가려면 먹을 것을 적지 않게 챙겨야 했다.

그 중에서도 된장이 문제였다. 묵직한 궁궐의 장독을 머나먼 영변까지 죄다 옮기기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일부는 운반하더라도, 누군가를 먼저 보내서 장(醬)을 좀 담가놓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중대사’를 맡을 적임자로 신잡이라는 관리가 추천되었다.

이를 놓고 ‘당쟁’이 벌어졌다. 다른 관리라면 몰라도 신잡만은 곤란하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신잡의 성(姓)인 신(申)은 장 담그기를 꺼려하는 신일(申日)과 음(音)이 같습니다. ‘신불합장(申不合醬)’이라고 했습니다. 불가(不可)합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이랬다. 된장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된장 청야전술’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벌써 망했을 만했다.

 김부복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ews34567@opiniontimes.co.kr)도 보장합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