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우리 문화재 이해하기] 춘천 현암리에 남아있는 이유는?

[논객칼럼=김희태] 춘천 덕두원 태실의 태주는 1589년 이전 선조의 자녀 가운데 한 명이며, 춘천 용산리 태실은 화협옹주의 태실이다.

태실은 전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문화재 중 하나로, 특히 태실이 있는 곳 주변에는 태봉산(胎封山)이나 태봉리(胎峯里) 등 지명 흔적을 함께 남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태실의 흔적은 강원도 춘천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춘천의 태실은 크게 ▲ 춘천 용산리 태실 ▲ 춘천 현암리 태봉 귀부 ▲ 춘천 덕두원 태실 등이 있다. 현재까지 세 곳 모두 비지정 문화재로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어 초행길에 찾기 쉽지 않고, 태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만 간혹 찾는 그런 장소들이다. 그럼에도 해당 태실들은 나름의 상징성과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오늘은 세 곳의 태실이 담고 있는 시대상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 사도세자의 친누나, 화협옹주의 태실로 확인된 춘천 용산리 태실 

춘천에 소재한 태실 중 첫 번째로 용산리 태실이 있다. 이 태실은 영조와 영빈 이씨 소생인 화협옹주의 태실로, 태실의 주소로 소개되고 있는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 산 1번지’로 검색할 경우 산 전체를 포괄하고 있기에 주소만으로 찾게 되면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다르지 않을 만큼 찾기가 쉽지는 않다.

때문에 해당 태실을 가기 위해서는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 716-2번지’에서 왼편에 있는 태봉산 정상으로 오르면 된다. 정상까지는 대략 5분 정도 소요되며, 여느 비지정 문화재가 그러하듯 이정표가 없다는 점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산 정상에 오르면 태실비와 태함의 덮개가 노출된 춘천 용산리 태실을 마주하게 된다. 

춘천 용산리 태실, 태실비와 태함의 덮개가 노출된 모습이다. Ⓒ김희태

안내문을 보면 최초 용산리 태실은 정상에 있던 민묘의 동쪽 경사면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경우다. 그런데 현재 태실비의 명문은 모두 누군가 인위적으로 훼손해서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다. 안내문이나 논문, 기타 자료 등을 취합해보면 태실비의 앞면에 ‘옹정십일년삼월초칠일인시생옹주아지씨??(雍正十一年三月初七日寅時生翁主阿只氏??)’가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옹정 11년으로, 옹정은 청나라 세종(=옹정제)의 연호다. 옹정 11년을 환산해보면 1733년(=영조 9년)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조의 서녀 중 1733년에 태어난 옹주를 찾으면 되는데, 이 경우 일치하는 인물은 영조와 영빈 이씨 소생의 화협옹주다. 

춘천 용산리 태실의 앞면 Ⓒ김희태
춘천 용산리 태실의 뒷면 Ⓒ김희태

화협옹주(1733~1752)는 사도세자의 친누이로 둘 사이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홍제전서> 18권, 현륭원의 행장을 보면 사도세자가 화협옹주를 생각했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해당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그 누이에게 각별한 정이 있는데, 지금 갑자기 가고 말았으니, 이 슬픔을 어디에다 비할까. 직접 가서 이 슬픔을 쏟을 길도 없으니 지극히 한이 된다.” 

- <홍재전서> 18권, 현륭원 행장 중 

한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을 보면 영화 <사도>에서 각색한 바 있는 영조가 귀를 씻고, 씻은 물을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기록을 보면 영조가 종종 사도세자를 불러 질문을 하고, 대답을 받으면 자신의 귀를 씻어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이 있는 쪽으로 버렸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사도세자와 화협옹주 모두 영조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1743년 화협옹주로 봉해진 뒤 그 해 4월 5일 영성위 신광수와 혼인했다. 하지만 1752년 불과 2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되고, 이에 슬퍼했던 사도세자가 비통한 심정을 남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배면에서 바라본 춘천 용산리 태실, 태주가 명확하기에 춘천 화협옹주 태실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김희태

한편 태실비에는 태실을 조성한 날짜와 태실비를 새긴 사람이 등장하는데, 명문을 보면 ‘옹정십일년오월이십사일진시생(雍正十一年五月二十四日辰時立) / 서표관승문원박사김징경(書標官承文院博士金徵慶)’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태실이 화협옹주가 태어난 그 해 5월 24일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표관(書標官)이자 승문원 박사였던 김징경이 비석을 새겼음을 알 수 있는데, 서표관은 태실 조성을 위임받은 안태사(安胎使)를 따라온 실무 관료였다. 이처럼 춘천 용산리 태실의 경우 태주가 명확하기에 명칭 역시 춘천 용산리 태실이 아닌 춘천 화협옹주 태실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 선조의 태실지였으나, 조성 과정에서 취소되어 그 흔적만 남은 춘천 현암리 태봉 귀부

북한강을 끼고 있는 ‘춘천시 서면 현암리 산 52-1번지’에는 봉우리 형태의 태봉산이 자리하고 있다. 태봉산 아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카페가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은 곳으로, 카페 혹은 맞은편 공터에 주차한 뒤 태봉산 정상으로 향하면 어렵지 않게 춘천 현암리 태봉 귀부를 만날 수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현암리 태봉 귀부는 산 정상에 귀부만 남아 있는 모습으로, 엄밀히 따지면 태실로 조성하다 실제 사용되지는 못했다. 다만 해당 귀부는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알려주고 있는데, 바로 선조의 태실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현암리에 소재한 태봉산의 전경, 산 정상에 현암리 태봉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김희태

보통 태실은 왕자나 공주, 옹주가 태어나면 아기씨 태실로 조성되었다. 이 경우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을 담은 태함과 아기씨 태실비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앞서 본 춘천 용산리 태실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훗날 태주가 왕(=매우 드문 사례이기는 하지만, 왕비 혹은 세자의 신분으로 태실가봉이 이루어진 사례 포함)이 될 경우 태실가봉(胎室加封)의 절차를 밟기에 이 경우 태실가봉비가 세워지게 된다. 따라서 현암리 태봉 귀부는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안내문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태실로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고, 귀부의 제작 시기 역시 조선시대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해당 귀부를 선조의 태실 흔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춘천 현암리 태봉 귀부, 최초 선조 태실의 조성 과정에서 아래 사유로 중단되어 임천에 조성된다. Ⓒ김희태

이는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3년(=1570년) 2월 1일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태(聖胎)를 임천(林川)에 묻었다. 상이 즉위하였을 때, 성태를 구례에 의하여 좋은 자리를 골라 묻어야 한다는 조정 논의가 있어 잠저(潛邸)를 뒤져 정원 북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찾아내었다. 그리고 강원도 춘천 지방에 자리를 정하여 공사를 했는데, 거의 끝나갈 무렵 그 혈(穴)이 바로 옛날에 태를 묻었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중략>... 조정에서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헌부가 사맹(=관찰사 구사맹)을 불경(不敬)으로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대신이 다시 깨끗한 자리를 골라야 한다고 건청(建請)하여 임천에 묻게 된 것이다. 당시 굶주린 백성들이 돌을 운반하는 데 동원되어 성태 하나를 묻는 데 그 피해가 3개 도시에 미쳤으므로 식자들이 개탄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3년 2월 1일자 기사 중 

위와 유사한 기록은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에서도 확인되는데, 해당 기록을 통해 최초 선조의 태실은 강원도 춘천에 자리를 정해 태실을 조성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사를 하던 중 과거 누군가 태를 썼던 장소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관찰사 구사맹은 발견된 태항아리 하나를 이유로 거대한 공사를 중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사를 강행했고,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구사맹은 불경의 죄로 파직된다. 이러한 이유로 춘천의 태실 조성은 중단되고, 조정에서는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임천군에 태실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흔적을 담고 있는 곳이 현암리 태봉 귀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태실가봉비는 태주가 왕이 되었을 때 별도로 조성했기에, 이러한 귀부가 나타난 것은 왕의 태실과 관련한 흔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교차 분석해보면 현암리 태봉 귀부와 최초 선조 태실의 조성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 춘천 덕두원 태실, 1589년 이전 선조의 자녀 중 한 명의 태실로, 의창군 태실의 가능성

춘천 덕두원 태실은 ‘춘천시 서면 덕두원리 산 72-3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 아래 봉덕사라는 사찰이 있어 태실을 찾는 좋은 이정표가 된다. 앞선 여느 태실과 마찬가지로 덕두원 태실 역시 이정표는 기대할 수가 없기에 초행길에 찾기란 쉽지 않은 편이나 태봉산 정상에 도착하면 안내문과 함께 태실비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태실비의 앞면은 마멸이 심해 육안 판독이 불가하고, 명문 역시 확인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뒷면으로, 마멸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연호 부분을 제외한 글자는 지금도 육안 판독이 가능하다. 안내문과 논문, 선행자료 등을 찾아보면 뒷면에 새겨진 명문을 알 수 있는데, 황명만?십칠년오월초파일사시입(皇明萬?十七年五月初八日巳時立)'이 새겨져 있다. 판독이 안 되는 글자는 앞의 필획을 통해 만력(萬曆)으로 추정되는데, 만력은 명나라의 신종(=만력제)의 연호다. 따라서 만력 17년을 환산해보면 1589년(=선조 22년)이 되기에, 해당 태실은 1589년 이전에 태어난 선조의 자녀 가운데 하나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태봉산 정상에 세워진 춘천 덕두원 태실 Ⓒ김희태
태실비의 앞면은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렵고, 뒷면의 경우 사진처럼 일부 확인이 가능하다. Ⓒ김희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해당 태실비의 경우 태지석이나, 앞면에 있었을 출생일이 확인이 되고 있지 않기에 정확하게 누구의 태실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해당 시기의 태어난 자녀들을 추정해보면 어느 정도 윤곽은 확인해볼 수 있다. 우선 선조의 자녀 중 적자인 영창대군과 정명공주의 경우 1589년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해당 태실은 선조의 자녀 중 서자 혹은 서녀의 태실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준에 부합되는 옹주는 1587년에 태어난 정숙옹주가 유일하나, 정숙옹주 태실의 경우 화성 산척리 태실비일 가능성이 높기에, 해당 태실은 옹주보다는 왕자의 태실로 볼 여지가 있는 편이다.

때문에 해당 태실의 경우 1589년 세워진 것을 기준으로, 하한선인 4년을 기준으로 태어난 왕자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하한선을 4년으로 보는 이유는 상주 연산군 원자 금돌이 태실의 경우 출생일과 태실비를 세운 시기가 4년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1. 경창군(1586년, 정빈 홍씨)

2. 인성군(1588년, 정빈 민씨)

3. 의창군(1589년, 인빈 김씨)

4. 흥안군(?, 온빈 한씨)

이 가운데 인성군 태실의 경우 청주 산덕리 태실(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86호)인 것이 확실하기에 제외된다. 경창군의 경우 하한선인 4년에 포함이 되기에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흥안군의 경우 태어난 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동생인 경평군의 출생이 1600년인 것을 고려하면 그보다 앞선 시기에 태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다만 1586~1589년 사이에 태어난 것인지 확인이 어렵고, 훗날 이괄의 난(1624)에 동조하며 대립왕이 되었던 전례를 볼 때 태실이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춘천 덕두원 태실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의창군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의창군은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의 왕자로 1589년 1월에 태어난 것으로 확인되는데, 태실 조성이 같은 해 5월 초파일인 것을 고려하면 통상적인 입비 시기와도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의창군 태실이라고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지만, 1589년 앞전의 자녀들 중 해당 조건에 부합이 된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춘천에 소재한 태실들은 저마다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서 바라볼 지점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비지정 문화재라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점에서, 태실의 접근성이나 이정표, 안내문 등의 정비가 필요하다.

혹 춘천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다면 3곳의 태실 ▲ 춘천 용산리 태실 ▲ 춘천 현암리 태봉 귀부 ▲ 춘천 덕두원 태실을 주목해보길 권한다.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답사 편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이야기가 있는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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