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나의 달빛생각]

[청년칼럼=이루나] 한글날, 용산에 위치한 한글 박물관에 들렀다가 핸드폰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 행사에 밀려드는 인파 속 틈바구니를 헤쳐나가다 애먼 사람과 부딪쳐 대리석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부딪친 사람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3년 반을 넘게 사용한 핸드폰이기에 이번 기회에 바꾸기로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졌다. 공시지원금, 선택약정, 할부원금, 결합할인 등 다양한 용어가 넘쳐났다. 하지만 이면에는 더 은밀한 암호가 숨어있다. ‘성지’라고 불리는 불법 보조금을 지급하는 업체의 장소와 할인 조건 등이 한글 초성이나, 유사 발음 등으로 에둘러 표시된다. 한글이되, 맥락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읽지 못하는 한글이다. 세종대왕이 이러라고 만든 한글이 아닐 텐데.

몇 번을 허탕 치다 집 근처 대리점에서 핸드폰을 샀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나보다 더 싸게 핸드폰을 구한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후기가 넘쳐난다. 혀끝이 쓰라리고 배가 아프다.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노력이 깡그리 배신당한 느낌이다. 내일은 또 얼마나 싸게 팔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핸드폰을 사는 순간 잠재적 호갱에서 확실한 호갱으로 거듭났다. 국어사전에는 이미 ‘호갱’이란 단어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손님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등재되어 있다. 언어는 사회의 얼굴이다. 우리 사회는 어쩌다 호갱의 불편한 경험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픽사베이

어느 누구도 호갱이 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세상이 호갱을 만든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부 정책마저도 믿었다가 배신당하는 경우도 많다. 평생 편히 살 수 있다고 홍보만 믿고 임대주택에 들어갔다가 몇 년 새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쫓겨날 처지가 되고, 아이를 낳지 말라고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펴더니, 어느 순간 아이를 낳아달라고 세금을 써가며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친다. 애써 빚을 갚지 않아도, 파산과 면책을 통해 빚을 탕감받을 수 있다. 입을 것, 먹을 것 줄여가며 열심히 이자 내며 빚 갚은 사람은 힘이 빠진다.

물론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정책도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에게 애써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바뀐 정책에 따라오라고 강조만 할 뿐, 기존 정책을 굳게 믿고 따라온 성실한 국민들의 피해는 안중에 없다. 국민들도 점점 호갱의 경험치가 쌓여가고 불신은 신념이 되어간다.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내어놓아도, 시장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저러다 또 다른 정책이 나오겠지.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겠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개인이 혼자서 싸우는 과정은 지난하다. 조그만 제품을 하나 사기 위해 수많은 정보를 뒤져야 한다. 최저가 기반으로 검색해도 카드사 할인, 배송비, 쿠폰, 적립금 등 따져야 할 변수가 너무 많다. 소비자의 노고를 대신해 친절하게 가격 비교 및 상품 추천을 해주는 플랫폼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물론 이 플랫폼들도 공짜는 아니다. 플랫폼에도 누군가의 인력과 자본이 투자되고, 이 비용은 관련 기업의 광고비, 투자금에서 나온다. 결국 플랫폼 비용마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예전처럼 장터에서 몇 번 발품을 팔면 시세와 좋은 상품이 보이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누군가 지나치게 싸게 샀다면, 누군가는 비싸게 사줘야 시장이 돌아간다. 정보에서 뒤처져 이른바 디지털 문맹이라 불리는 고령자들과 취약계층이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만다.    

어느 순간 모든 국민이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애써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누군가 이득을 본 정보는 무용담이 되어 인터넷을 떠돌고, 나머지 사람은 기회를 잡지 못한 호갱이 되고 만다. 월급을 모아 열심히 저축을 해도, 부동산과 비트코인을 통해 순식간에 돈을 번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 배가 아파 입맛이 사라진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비교 대상이다. 되려 가까운 친지나 친구가 돈을 벌면 배가 더 아프다. 난 왜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배가된다.

왜 모두가 호갱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등바등 싸워야 하는 것일까? 이미 정보를 통해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판옵티콘의 사회로 접어들고 만 것일까? 한문을 몰라 호갱이 되는 국민들을 어여삐 여겨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낸 세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새로 산 휴대폰의 시세를 검색하며 우울해하던 중 아내가 한마디 던진다. 이미 산 핸드폰은 어쩔 수 없으니 가격에 그만 연연하고, 보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생각을 하란다. 정신이 번쩍 든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과 평생을 약속한 아내가 호갱이 되지 않아야 할 텐데. 호갱 탈출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이루나

달거나 짜지 않은 담백한 글을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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